I. 서 론
21세기 교육 개혁의 핵심 흐름인 역량 기반 교육(Competency-Based Education, CBE)은 2000년대 초 OECD의 DeSeCo 프로젝트를 기점으로 여러 국가 교육과정의 중심 개념이 되었다(소경희, 2009, pp. 1-2). 우리나라 역시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 핵심역량을 명시한 데 이어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 깊이 있는 학습과 전이, 핵심 아이디어 중심의 내용 체계, 학습의 향상과 성장을 지원하는 평가를 강조함으로써 역량 함양을 교육과정 전반의 지향으로 삼았다(교육부, 2022).
그러나 역량 기반 교육은 교육과정 문서에 역량을 명시하는 것만으로 실현되지 않는다. 이는 학생이 무엇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배우고 자신의 지식과 기능을 드러내는지에 관한 전통적 이해를 근본부터 재구성하는 체제 차원의 변화이며(Evans et al., 2020, p. 1), 교육과정, 교수·학습, 평가가 일관되게 정렬될 때 그 목적에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다(백남진, 온정덕, 2016; Looney, 2011, p. 5). Evans 외(2020, p. 13)가 수행한 K-12 역량 기반 교육의 체계적 문헌 분석에 따르면, 역량 기반 교육의 실행을 촉진하거나 가로막는 요인은 맥락과 실행 단계에 따라 달라지고 성과 또한 한결같지 않다. 역량 기반 교육의 성패는 지향하는 바 그 자체보다 그것을 교실의 구체적 실천으로 옮겨내는 도구와 절차에 달려 있는 것이다. 전통적 학교 체제가 학생을 학년 단위로 진급시키는 동안 학습에 관해 축적된 지식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결과, 학생들이 학년이 올라가도 더 어려운 개념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토대를 갖추지 못한 채 학습 결손을 누적해 왔다는 지적(Achieve, 2015, p. 1)은 역량 기반 교육에 학습의 실제 발달을 정밀하게 포착하는 장치가 필요함을 보여 준다.
역량을 교실 속 실천으로 옮기는 일이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역량이 본래 추상적이고 내면적인 구성물이라는 데 있다. 역량은 그 자체로는 직접 관찰되거나 측정되지 않고, 학습자가 지식과 기능을 새로운 맥락에 적용하는 수행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드러난다(Blömeke et al., 2015, p. 3). 따라서 역량 기반 교육을 교실에서 실행하려면 추상적인 역량을 관찰 및 평가 가능한 수행의 양상으로 구체화하는 것, 즉 역량을 가시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추상적으로 규정된 역량을 교과 학습의 맥락에서 관찰·평가 가능한 수행의 양상으로 구체화하여 교수·학습과 평가의 준거로 삼는 것이다.
우리나라 교육과정에서 가시화의 핵심 장치가 되어야 할 성취기준과 성취수준은 역량의 특성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교과 교육과정의 성취기준은 7차 이후 ‘내용과 행동’ 형태로 진술되어 왔다(백남진, 2014, pp. 110-111). 그러나 서술어가 ‘안다·이해한다’에 머무를 경우 내용 기준의 성격을 띠게 되어 학생이 아는 것을 적용·시연하는 수행 능력을 드러내기 어렵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백남진, 2014, pp. 108, 113).
2022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단위학교를 위해 마련된 성취수준 역시 학생이 도달해야 할 최소 목표인 성취기준의 내용 요소를 수준 구분의 기준으로 삼는 경향을 보였고, 성취기준을 이루는 지식·이해, 과정·기능, 가치·태도의 세 범주를 분리하여 수준을 매기는 방식을 취하였다(윤지영, 온정덕, 2025, pp. 95-96). 그 결과 수준 간의 차이가 학습 내용을 얼마나 깊이 있게 이해하고 새로운 상황에 적용하는지 질적 차이로 드러나기보다, 같은 내용을 더 많이 또는 더 능숙하게 다루는 양적 차이로 환원되는 한계를 보였다. 이는 수준 구분이 내용 요소의 단순 반복이나 부사어 수식에 그칠 때 생기는 문제로 수행수준 기술 연구에서 지적된 바가 있다(Perie, 2008).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려는 대안으로 수준 구분의 준거를 낱낱의 내용 요소가 아니라 단원 전체를 관통하는 일반화(generalization)에 두고, 수준의 높낮이를 학습자가 그 내용을 이해하고 적용할 때 동원하는 사고의 깊이와 정교함에 따라 구분하자는 제안이 제시되었다(윤지영, 온정덕, 2025, pp. 99-100). 그러나 이 제안이 실제 교실에서 구현되려면 역량이 발달하는 경로를 체계적으로 기술하고 특정 시점에서 학습자의 수행수준을 질적으로 판별해 줄 구체적 도구가 필요하다. 그 도구가 바로 학습 진보도(learning progressions)와 수행수준 기술(performance level descriptors, PLDs)이다. 학습 진보도는 초보적 이해에서 전문적 이해로 나아가는 발달의 경로를 개념적 지도로 제시하며(Achieve, 2015, p. 3; Heritage, 2008, p. 2), 수행수준 기술은 그 경로 위의 각 지점에서 학습자의 수행이 드러내는 인지적 복잡성의 질적 차이를 기술한다(Hess et al., 2020, pp. 77-78). 두 도구가 맞물릴 때 교사는 교육과정, 교수·학습, 평가를 일관되게 잇는 준거를 얻고, 학습자는 자신의 현재 위치와 다음 단계를 분명히 인식할 수 있게 된다.
학습 진보도와 수행수준 기술에 관한 논의는 주로 해외 과학교육 연구에서 이루어졌다. 국내에서도 과학교육을 중심으로 특정 핵심 개념의 학습발달과정을 개발하고 경험적으로 타당화하는 연구가 이어졌으며(맹승호 외, 2013; 신남수 외, 2014; 여채영, 이효녕, 2016), 이들은 대체로 개별 개념의 발달 경로를 검증하는 데 집중하였다. 이와 달리 모든 교과의 단원 설계에서 두 도구를 성취수준 개발과 연결하여 통합적으로 구현하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다룬 연구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특히 성취수준의 대상을 일반화로 설정하고 인지적 복잡성에 근거하여 수행수준을 기술하는 방식이 실제 단원에서 어떤 모습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예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에 본 연구는 역량 기반 교육을 지향하는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 교과 학습을 통해 역량을 가시화하는 방법으로 학습 진보도와 수행수준 기술의 의미와 기능을 이론적으로 탐색하고, 이를 바탕으로 역량의 가시화를 위한 단원 설계 원리를 도출한 후, 그 원리가 서로 다른 층위에서 구현될 수 있음을 두 가지 예시로 보임으로써 역량 기반 교육의 실천 가능성을 탐색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러한 목적에 따라 본 연구가 다루는 연구 질문은 다음과 같다. 첫째, 역량 기반 교육에서 교과 학습을 통한 역량의 가시화는 무엇을 의미하며 왜 필요한가? 둘째, 역량을 가시화하는 도구로서 학습 진보도와 수행수준 기술은 어떤 개념적 특성과 상호 관계를 지니며, 여기에서 어떤 단원 설계 원리를 도출할 수 있는가? 셋째, 도출된 설계 원리는 교육과정 체제 수준과 교과 단원 수준이라는 두 층위에서 각각 어떤 모습으로 구현될 수 있는가?
본 연구는 역량의 가시화를 초점으로 삼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두 이론적 자원인 학습 진보도와 수행수준 기술을 통합적으로 분석하여 단원 설계 원리를 도출하는 개념적·이론적 연구(conceptual study)다. 이러한 접근은 경험적 자료의 수집·검증이 아니라 기존 이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통합을 통해 새로운 관점과 실천 원리를 구성하는 데 목적을 둔다. Jaakkola(2020)는 개념적 연구도 명확한 연구 설계에 기반하고 활용 이론의 역할을 명시·정당화할 것을 요구하며, 설계 유형을 이론 종합·이론 조정·유형화·모형으로 구분한다. 이 가운데 본 연구는 복수의 문헌을 새롭게 통합하여 향상된 관점을 구성하는 이론 종합(theory synthesis)의 접근을 취한다. 이때 학습 진보도와 수행수준 기술은 통합의 대상이 되는 영역 이론(domain theories)이며, 두 영역의 핵심 차원을 정렬·조직하는 방법 이론(method theory)으로는 인지적 복잡성(cognitive complexity)을 활용한다. 본 연구의 통합은 두 문헌의 요약에 그치지 않고 각 개념의 구성 요소를 분해하여 공통 기반 위에 새로운 분석틀을 구성하며, 이 분석틀은 역량의 가시화를 위한 단원 설계 원리 도출의 근거가 된다. 구체적인 연구 수행 절차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론 종합의 대상이 되는 문헌을 선정하였다. 개념적 연구의 문헌 선정은 논증에 필요한 이론을 목적적으로 선택하되 선택의 논리를 명시할 것이 요구된다(Jaakkola, 2020). 이에 역량 기반 교육, 학습 진보도, 수행수준 기술 각 개념의 정의와 속성, 활용 원리를 다룬 저작과 국가·주 수준 기관의 보고서, 각 분야의 연구 동향이나 개념적·방법적 쟁점을 체계적으로 검토한 논문, 2022 개정 교육과정의 성취기준·성취수준을 직접 분석한 국내 최근 연구를 선정 대상으로 삼았다. 다만 개별 개념의 발달 경로를 심리측정적으로 타당화하는 경험 연구는 단원 설계 원리 도출이라는 본 연구의 초점과 직접 관련되지 않아 분석 대상으로 삼지 않았으며, 국내 과학교육의 학습발달과정 연구는 국내 연구 동향을 제시하는 범위에서 참조하였다. 선정된 문헌 가운데 학습 진보도와 수행수준 기술 문헌은 영역 이론으로, 인지적 복잡성 문헌은 두 영역을 정렬하는 방법 이론으로 역할을 구분하였다. 둘째, 학습 진보도와 수행수준 기술의 정의와 속성을 비교하여 상호 보완적 관계를 밝히고, 이를 인지적 복잡성을 축으로 정렬하여 분석틀을 구성하였다. 이어 교수·학습 설계, 형성평가와 피드백, 학습자의 자기평가와 주도성의 세 차원에서 기대되는 효과를 검토하고, 공통으로 확인되는 설계상의 요구를 종합하여 네 가지 설계 원리를 도출하였다. 셋째, 이 원리가 서로 다른 층위에서 구현될 수 있음을 살펴보기 위해 교육과정·평가 체제 수준의 사례로 호주 빅토리아주 VCAA의 형성평가 루브릭 가이드, 교실 단원 수준의 사례로 2022 개정 사회과 교육과정에 근거해 연구자가 설계한 단원을 동일한 네 원리에 비추어 분석함으로써 원리의 적용 가능성을 예시하였다.
II. 역량 기반 교육과 역량의 가시화
역량 기반 교육은 모든 학습자가 교과의 핵심 지식을 충실히 익혀 이를 실제 문제 상황에 활용하는 전문성을 기르고, 스스로 배움을 이어가는 평생 학습자로 자라도록 보장하려는 교육적 지향이다(소경희, 2009, pp. 3-5). 이 지향에서 역량은 복잡한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지식·기능·태도·가치를 통합적으로 동원하는 수행 능력으로 정의되며(OECD, 2019), 학습자가 특정 역량을 숙달했음을 증명할 때 진보가 인정된다는 점에서 시간의 경과를 기준으로 삼는 전통적 모형과 구별된다(Le et al., 2014, p. 1).
역량 기반 교육의 주요 원리는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지식은 고정된 결과가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으로 재정의된다. 전통적 교육과정이 지식의 습득과 기억을 중심으로 구조화되었다면, 역량 기반 교육에서 지식은 여러 맥락 속에서 재구성되는 역동적 구조로 파악된다(온정덕 외, 2025, pp. 56-58). 둘째, 교육 내용은 개별 사실이나 기능의 나열이 아니라 핵심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한 개념적 구조로 조직된다. 2022 개정 교과 교육과정은 학생이 배워야 할 내용을 교과의 근본이자 학습의 토대가 되는 핵심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지식·이해, 과정·기능, 가치·태도의 세 범주가 서로 유기적으로 이어지도록 체계화하였다(한혜정 외, 2022, pp. 53-55). 셋째, 역량 기반 교육이 학습자에게 기대하는 핵심 결과는 깊이 있는 학습(deeper learning)을 통한 전이(transfer)다. 전이란 학생이 학습한 내용을 새로운 환경에 적용하게 하는 고차적 사고 능력을 포함하며, 근거리 전이(near transfer)에서 원거리 전이(far transfer)에 이르는 연속선 위에 존재한다(Marion et al., 2020, p. 13). 넷째, 평가는 학습의 종착점이 아니라 학습 과정 전반에 걸쳐 작동하는 환류 장치로 기능한다. 역량 기반 교육에서 평가는 학생을 분류하거나 선발하는 목적(assessment of learning)에 그치지 않고, 학습을 위한 평가(assessment for learning)를 포함함으로써 학생의 의미 있는 학습 경험에 통합된다(Evans et al., 2020, p. 3).
지식의 성격에서 평가의 역할에 이르기까지, 네 원리는 학습 내용의 양이나 학습에 들인 시간이 아니라 학생이 배운 것을 새로운 상황에서 실제로 해낼 수 있는가, 곧 수행으로 드러나는 능력으로 판단하려는 지향을 가리킨다. Evans 외(2020, p. 3)가 역량 기반 교육에서 공통으로 확인되는 요소로 명확한 학습 목표(shared learning targets), 공통된 수행 기대(common performance expectations), 그리고 숙달의 증거에 기반한 학생 진보(student progress based on evidence of proficiency)를 드는 것 또한 이러한 지향에 부합한다. 학생의 진보를 학생이 앉아있던 시간이 아니라 숙달의 증거로 판단한다는 이 관점은 역량 기반 학습에서 학습의 진보란 학년마다 별도로 설정된 기준에 순차적으로 도달하는 것으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연속선이나 진보도 위에서 발달하는 전이 가능한 역량에 초점을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역량의 성취 여부를 확인하려면 교과에서 학생이 배우기를 바라는 내용과 그 학습이 어느 정도까지 나아갔는가를 구분하는 기준이 반드시 마련되어야 하며, 이렇게 판단되는 수행의 질적 수준은 학생들 사이의 상대적 비교가 아니라 미리 설정된 준거(criterion referenced)에 비추어 평가된다(Looney, 2011, p. 12).
역량 기반 교육에서 교과 학습은 역량을 계발하는 자리이자 동시에 그 역량이 드러나는 실질적 맥락이다. 역량은 진공 상태에서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교과가 마련해 주는 개념적 구조와 탐구 방식 안에서 지식·기능·가치가 하나로 통합될 때 구현된다. 전통적 교수·학습이 교과 지식의 습득과 서열화된 평가에 중점을 두었기에 학습자가 삶에서 필요한 역량을 갖추도록 돕기에는 부족하다는 지적은 꾸준히 이어져 왔다(Greenstein, 2012, pp. 7-9; Patrick et al., 2017, pp. 4-5). 역량 기반 교육이 대안으로 내놓는 것은 무엇을 아는가보다 아는 것을 실제 맥락에 어떻게 적용하는가를 중심에 두는 전환이다(Sturgis & Casey, 2018, p. 5). 이때 교과는 내용을 전달하는 도구에 그치지 않고, 학습자가 역량을 키우고 발휘하는 구조화된 실천의 공간이 된다. 이러한 관점은 2022 개정 교육과정에도 명확하다. 교과별 핵심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학습량을 적정화하고, 학생이 거쳐야 할 사고·탐구·문제 해결의 과정을 학습 내용으로 명료화하여 교수·학습과 평가의 방법을 개선하도록 한 것(교육부, 2022)은 교과 학습이 역량 함양의 실질적 통로임을 교육과정 차원에서 분명히 밝힌 것이다.
역량을 가시화한다는 것은 추상적으로 규정된 역량을 교과 학습의 맥락에서 관찰·평가할 수 있는 수행의 양상으로 구체화하는 일이다. 역량은 그 자체로는 직접 측정하기 어려운 내재적 속성을 지니므로, 학습 과정에서 드러나는 수행의 양상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Blömeke et al., 2015, p. 3). 이 가시화는 구체적으로 학습 진보도를 기술하는 것으로 가능할 수 있다. Corcoran 외(2009)는 학습 진보도를 학습자가 중요한 지식이나 실천 영역에 대해 점차 정교하게 사고해 가는 과정을 가설적으로 기술한 것으로 정의하면서, 이 경로는 하위 정착점(lower anchor)과 상위 정착점(upper anchor) 사이의 중간 수준들을 학습자의 수행으로 기술할 때 구체화된다고 보았다. 여기서 상위 정착점은 교육을 통해 이르기를 기대하는 목표, 즉 역량이 온전히 발현된 모습이며, 하위 정착점은 학습자가 학습에 들어설 때 이미 지닌 선행 지식과 기능의 수준이다. 두 정착점 사이의 각 수준을 수행의 언어로 풀어내는 것이 바로 역량을 가시화하는 실천적 형태이다. 다만 이러한 가시화가 교수·학습으로 이어지려면, 진보 경로가 교사의 수업 설계와 형성평가의 근거로 기능해야 한다. Heritage(2008, pp. 5-7)는 학습 진보도가 교사에게 학습자의 현재 위치와 목표 사이의 간격을 가늠하게 하는 큰 그림을 제공하며, 교사가 이 경로를 분명히 이해할 때 형성평가의 증거를 해석하고 다음 수업 단계를 정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결국 학습 진보도로 구체화된 역량의 가시화는 추상적인 역량 담론과 교사의 일상적 수업 판단을 잇는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학습 진보도의 상위 정착점, 즉 역량이 발현되는 목표 수준은 무엇을 기준으로 설정되어야 할까? 역량 가시화의 대상을 개별 성취기준의 세부 내용이 아니라 단원 수준의 개념적 이해인 일반화에 두어야 한다는 주장은 여러 교육과정 설계 이론이 공통으로 제시하며 그 근거는 전이 가능성에 있다. 사실적 지식은 특정한 시간·장소·상황에 묶여 좀처럼 전이되지 않지만, 개념과 일반화는 개념 사이의 관계를 담은 지식이기에 맥락을 넘어 새로운 상황에 적용될 수 있다(Erickson & Lanning, 2014, pp. 33-34). 역량이 아는 것을 새로운 맥락에 적용하는 능력으로 정의되는 한, 수행수준을 기술하는 준거 또한 일반화를 중심으로 세워져야 한다(Erickson & Lanning, 2014, pp. 33-34; Wiggins & McTighe, 2005, pp. 17-18). 달리 말하면, 역량을 가시화하는 기준이 사실과 기능의 습득에 머무는 순간 그 수행 기술은 역량의 본질인 전이를 놓치고 만다.
이러한 주장은 학습 진보도가 구성되는 방식에서도 같은 결론으로 이어진다. Hess(2008, pp. 4-5)는 학습 진보도가 교과의 핵심 개념과 과정을 꿰는 실(binding thread)을 중심으로 기술되어야 하며 상위 정착점은 개별 성취기준이 아니라 교과의 핵심 아이디어와 깊이 있는 개념적 이해에 대응한다고 본다. 더욱이 진보도 위에서의 성장은 더 깊고 더 넓고 더 정교한 이해로 옮겨 가는 과정, 곧 학습자가 점점 더 넓은 맥락에 개념적 이해를 적용해 가는 방향으로 그려진다(Hess, 2008, p. 5). 이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성취기준은 진보도 위 한 지점을 부분적으로 가리킬 뿐, 학습자가 도달해야 할 상위 수준의 심화된 사고와 추론까지 온전히 담아내지는 못한다. 수행수준 기술이 이 진보도 위에서 학습자의 위치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수준과 수준을 가르는 준거 역시 진보도를 조직하는 원리인 개념적 이해의 깊이와 적용 범위를 그대로 따라야 한다. 따라서 역량의 수행수준을 기술하는 일은 개별 성취기준을 늘어놓는 방식이 아닌 단원의 목표로 설정한 일반화, 곧 학습자가 개념과 기능을 통합하여 도달해야 할 개념적 이해를 준거로 삼아야 한다.
Wiggins & McTighe(2005)의 이해 중심 교육과정(Understanding by Design, UbD)과 Erickson & Lanning(2014)의 개념 기반 교육과정 설계는 모두 학습 목표를 사실이나 기능의 습득을 넘어 지식을 실제 상황으로 전이할 수 있는 일반화 수준의 이해로 설정할 것을 요구한다. 2022 개정 교육과정이 역량 교육에서 깊이 있는 이해에 바탕을 둔 전이를 강조하고 핵심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내용 체계를 재구성한 것 또한 일반화 수준의 이해가 교과 학습의 핵심 목표가 되어야 함을 교육과정 차원에서 명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교육부, 2022; 임유나, 2022, p. 37).
III. 역량의 가시화를 위한 학습 진보도와 수행수준 기술
교과 학습에서 역량을 가시화하려면 두 가지 핵심 질문에 답해야 한다. 하나는 ‘역량이 발달하는 경로를 어떻게 체계적으로 기술할 것인가’이고, 다른 하나는 ‘특정 시점에서 학습자의 역량 수준을 어떻게 판별하고 소통할 것인가’이다. 앞의 질문은 학습의 종단적 발달 궤적을 다루는 것으로 학습 진보도의 역할이고, 뒤의 질문은 특정 학습 과제나 단원에서 학습자의 수행을 질적으로 가르는 횡단적 기술에 관한 것으로 수행수준 기술의 역할이다.
역량 함양을 목표로 삼는 교육에서 성취수준은 단지 점수나 등급을 매기기 위한 기술적 장치가 아니다(백남진, 온정덕, 2014, p. 28). 성취수준은 모든 학습자가 이르기를 기대하는 기준으로 상위 정착점에 비추어 지금 각 학생이 어디쯤 있는지를 보여 주고, 그 자리에서 다음 단계로 어떻게 나아갈지 방향을 보여 주는 디딤돌이자 지도여야 한다(맹승호 외, 2013, pp. 164-167).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2022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마련된 성취수준은 학생이 도달해야 할 최소 목표인 성취기준의 내용 요소를 수준 구분의 바탕으로 삼고 성취기준을 이루는 세 범주를 따로 나누어 수준을 제시함으로써 깊이 있는 이해와 적용이라는 역량의 특성을 충분히 살리지 못하였다(윤지영, 온정덕, 2025, pp. 95-96). 이는 수행수준 기술 연구에서 지적된 문제인 수준의 차이가 내용 요소의 단순 반복이나 부사어 수식에 그치면 수준 사이의 인지적 요구 차이가 흐려진다는 비판과 같은 맥락에 놓인다(Perie, 2008, p. 24).
이러한 한계는 역량을 가시화할 수 있는 체계적인 도구의 필요성으로 이어진다. 특히 수행수준 기술이 가시화의 기능을 제대로 해내려면, 수준 구분의 기준이 내용의 양적 변화가 아니라 인지적 복잡성의 질적 차이에 놓여야 한다. 인지적 복잡성이란 학습자에게 요구되는 정신적 처리의 깊이와 정교함을 가리키며, 단순한 기억·재생에서 개념적 이해, 추론·분석을 거쳐 확장된 사고로 나아가는 연속선 위에서 파악된다(Webb, 2002). 수행수준이 이러한 인지적 복잡성의 차이를 기준으로 기술될 때 학습자가 ‘단지 더 많이 아는가’가 아니라 ‘더 깊이 사고하고 더 넓은 맥락에 적용하는가’라는 관점에서 역량의 발현 수준이 드러난다. 학습 진보도와 수행수준 기술을 역량 가시화의 핵심 도구로 삼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학습 진보도는 특정 교과 영역에서 학생의 학습이 차츰 발전해 가는 경로를 체계적으로 기술한 것으로, 초보적 수준에서 전문적 수준에 이르는 이해와 기능의 발달을 연속선 위에서 다루는 개념이다. Heritage(2008, p. 2)는 학습 진보도를 학생들이 특정 지식 영역에서 학습을 어떻게 발전시켜 가는지를 명확히 기술하는 도구로, Masters & Forster(1996, pp. 1-2)는 기술·이해·지식이 일반적으로 발달하는 순서를 나타낸 수직적 지도로 본다. Popham(2007, p. 83)은 학생이 더 먼 교육과정 목표를 숙달하기까지 거치는 길에서 반드시 익혀야 할, 세심하게 배열된 핵심 구성 요소들의 집합으로 규정하며, National Research Council(2007, p. 219)은 넓은 시간 범위에 걸쳐 한 주제를 배우고 탐구하면서 하나씩 이어지며 점점 더 정교해지는 사고방식에 대한 기술로 정의한다.
이와 같은 정의에서 드러나는 공통된 속성은 장기간에 걸친 수직적 발전이다. 학습 진보도의 주요 특성은 네 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 첫째는 연속성과 일관성이다. 학습 진보도는 학습을 따로 떨어진 사건들의 연쇄가 아니라 한 영역 안의 지식, 개념, 기능이 서로 연결된 발달 궤적으로 바라본다. 어떤 지점의 앞뒤에 무엇이 오는지가 분명히 연결되어 있어, 교사는 학생의 현재 위치를 가늠하고 다음 단계를 정할 수 있다(Heritage, 2008, p. 3). 둘째는 위계적 구성이다. 진보도의 각 수준은 앞 수준의 이해와 기능 위에 쌓이며 동시에 다음 수준으로 나아가는 토대가 된다(Duncan & Hmelo-Silver, 2009, pp. 606-607; Mohan et al., 2009). 셋째는 탐구와 증거에 기반한다는 점이다. 학습 진보도는 경험적으로 검증되어야 하고, 학생이 학습에 반응하는 방식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정교화되어야 한다(Achieve, 2015, p. 3). 넷째는 비선형성이다. 학습 진보도가 순서를 전제하기는 하지만 실제 학습이 반드시 직선의 궤적을 따르는 것은 아니어서 학생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때로 뒤로 물러서기도 한다(Heritage, 2008, p. 3; Masters & Forster, 1996, p. 2). 이처럼 학습 진보도는 학습의 실제 경로를 처방하는 것이 아니라 교수·학습 판단을 돕는 가설적인 경로로 기능한다(Corcoran et al., 2009; Scott et al., 2019, p. 3). 여기서 주목할 점은 어느 정의에도 학년이나 연령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사실이다. 학습은 어디까지나 전문성이 점점 높아지는 연속선으로 기술된다.
이러한 속성은 진보도의 구체적인 사례에서도 볼 수 있다. Heritage(2008, pp. 8-10)는 철자법(spelling)·수 세기·역사적 이해의 진보도를 예로 든다. 가령 철자 발달은 음소 이전, 초기 음소, 음소, 전환, 파생적 관계의 다섯 단계로 기술된다. 음소 이전 단계의 학생은 글자를 쓰려고 할 때 문자와 형태를 늘어놓을 뿐 소리와 문자의 대응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파생적 단계에 이르면 형태소 지식을 활용해 복잡한 어휘의 철자를 분석하고 만들어 낸다. 영국 국가 교육과정의 역사 진보도 역시 초등 저학년부터 16세까지 역사적 이해의 발달을 여덟 수준으로 기술하는데, 가장 낮은 수준에서는 현재와 과거를 구분하는 기초적 인식을, 가장 높은 수준에서는 사건·인물·변화 사이의 관계를 분석하고 서로 다른 역사적 해석을 평가하는 고차적 사고를 기대한다(Heritage, 2008, p. 10). 이 사례는 학습 진보도가 특정 학년이나 연령이 아니라 학습자의 사고가 정교해진다는 발달의 논리에 따라 수직적으로 구성됨을 드러낸다.
학습 진보도가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는 Mohan 외(2009)가 개발한 탄소 순환(carbon cycling) 학습 진보도이다. 이 연구는 초등 고학년부터 고등학교까지 학생들이 탄소 변환 과정을 이해하는 방식이 어떻게 차츰 정교해지는지를 네 수준으로 기술하고, 각 수준의 특성과 함께 학생 응답 예시를 제시한다(<표 1>). 이 진보도에서 특히 중요한 점은 수준 사이의 이동이 지식이 단순히 쌓이는 과정이 아니라 이해 방식 자체가 바뀌는 인지적 전환이라는 데 있다(Scott et al., 2019, p. 3). 1수준에서 4수준으로의 이동은 음식·성장과 같은 거시적이며 직관적 현상에 머무르던 이해가 탄소 원자가 화학 반응을 통해 유기물과 무기물 사이를 이동한다는 원자와 분자 수준의 체계적 모형으로 질적으로 도약하는 과정이다. 이 진보도는 미국과 중국 학생을 대상으로 한 비교 연구에서 경험적으로 검증되었고 수업 설계의 토대로도 쓰였다는 점에서 학습 진보도가 교육적으로 타당한 발달의 지도가 될 수 있음을 실증한다(Chen & Anderson, 2015, pp. 456-458).
출처: Mohan 외(2009, pp. 684-691)의 성취수준 서술을 바탕으로 재구성함.
수행수준 기술은 각 수준의 학생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진술한 것으로, 학습이 도달해야 할 수준에 대한 기대를 구체적으로 드러낸다(Hess et al., 2020, p. 88). 각 수준의 기술은 학습자가 전문성을 발전시켜 가는 양상을 반영하는 연속체를 따라 배열되며, 얼마나 많이 수행하는가가 아니라 이해의 깊이와 사고·추론의 정교함이라는 질에 따라 구분된다. 이때 낮은 수준은 이후 학습이 쌓여 갈 기초 기능을 담고, 높은 수준으로 갈수록 더 깊은 사고와 추론을 요구하는 수행을 담아낸다(Hess et al., 2020, pp. 85, 88). 수행수준 기술은 양적 구분에 그치지 않고 각 수준에서 학습자가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 줌으로써, 교사와 학습자가 수행의 질에 대한 이해를 공유하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
Egan 외(2012)는 수행수준 기술을 네 유형으로 나눈다. 정책 PLDs(policy PLDs)는 수행 기준의 목표와 엄격성을 밝히는 일반적 진술이고, 범위 PLDs(range PLDs)는 각 기준과 수준마다 학생 성취의 관찰 가능한 증거를 기술하면서 수준을 거치며 기능이 어떻게 정교해지는지를 보여 주는 상세한 진술이다. 목표 PLDs(target PLDs)는 특정 수준의 최소 기대를 명시하여 기준 설정을 안내하며, 보고 PLDs(reporting PLDs)는 학부모와 학생 등 다양한 독자에게 수행수준의 의미를 전달한다.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 교사가 작성하도록 요구되는 학기 단위 성취수준 진술문은 학생 성취의 관찰 가능한 증거를 수준별로 기술한다는 점에서 범위 PLDs에 가깝다. 그리고 이 진술문을 일관되게 작성하려면 수준을 구분하는 일반적 기준인 정책 PLDs가 먼저 마련되어야 한다(윤지영, 온정덕, 2025, pp. 95-96).
수행수준 기술의 이론적 토대로는 인지적 엄격성(cognitive rigor)에 관한 논의가 핵심을 이룬다. 인지적으로 엄격하다는 말은 그저 학습 내용이 어렵다는 뜻이 아니라 인지적으로 복잡하다는 뜻이며, 여기에는 다루는 내용 자체의 복잡성, 그 내용을 다루는 학습자의 사고, 그리고 계획된 학습 활동의 범위가 함께 포함된다(Hess et al., 2020, p. 77). 이때 인지적 엄격성이 역량 진술과 평가 과제가 갖추어야 할 질적 요건이라면, 그 요건이 어느 정도 충족되었는지를 판별하는 준거는 과제가 요구하는 인지적 복잡성이다. Webb(2002)의 지식의 깊이(Depth of Knowledge, DOK)는 인지적 복잡성을 학생이 과제를 수행할 때 요구되는 정신적 처리의 깊이에 따라 네 수준으로 가른다. 이 틀은 학습 진보도의 각 수준이 교실 수업에서 어떤 구체적 수행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 주는 기준이 된다(<표 2>).
출처: Hess 외(2020, p. 78)를 재구성함.
DOK와 더불어 Marzano & Kendall(2007, 2008)의 교육목표분류학도 수행수준을 설정하는 이론적 기반으로 쓰인다. 이 분류학은 인출·이해·분석·지식 활용이라는 네 인지 체제 수준을 위계로 제시한다(Marzano & Kendall, 2008, pp. 30-39). Marzano & Abbott(2022, p. 72)는 이를 바탕으로 교과별 숙달 척도(proficiency scales)를 제시하였는데, 이는 학습 진보도와 수행수준 기술이 하나의 도구로 합쳐진 형태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언어 교과에서 주제 파악과 텍스트 요약을 위한 숙달 척도를 보면, 2.0 수준은 교사가 제공한 그래픽 조직자를 활용하여 텍스트를 요약하고 주제를 뒷받침하는 세부 사항을 찾아내는 것으로, 3.0 수준(목표 수준)은 텍스트의 세부 사항에 근거해 주제를 밝히고 텍스트를 요약하는 것으로, 4.0 수준은 비슷한 주제를 다룬 여러 텍스트를 파악하고 저자가 그것을 제시한 방식의 같고 다름을 설명하는 것으로 기술된다. 이렇듯 숙달 척도의 각 수준은 학생의 학습 진보를 인지적 복잡성의 연속선 위에서 체계적으로 살피게 해 주며, 학생의 자기평가와 교사의 피드백을 지원하는 도구로 기능한다.
본 연구가 DOK를 방법 이론의 중심 틀로 삼은 근거는 세 가지다. DOK는 성취기준과 평가의 정렬(alignment) 분석을 위해 개발된 틀로 교육과정, 교수·학습, 평가의 정합성을 지향하는 본 연구의 문제의식과 부합하고(Webb, 1997, 2007), 학습자 능력의 발달 단계가 아니라 과제가 요구하는 인지적 복잡성을 기술하므로 과제 중립적 수행수준 기술의 준거로 활용될 수 있으며, 영역 이론인 Hess 외(2020)에서 인지적 엄격성의 기준 틀로 채택하고 있어 방법 이론과 영역 이론의 정합성이 확보된다. Marzano의 신교육목표분류학은 DOK를 대신하는 별개의 틀이 아니라, 두 도구가 숙달 척도로 통합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보완적인 참조 자료로 활용한다.
수행수준을 기술할 때는 세 가지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Hess et al., 2020, pp. 95-96). 첫째, 다양한 유형의 평가와 학습 활동 설계, 루브릭과 채점 가이드 개발에 활용될 수 있도록 특정 과제에 종속되지 않는 과제 중립적 진술이어야 한다. 둘째, 산출물의 양적 측면이 아니라 질적 측면에 초점을 두도록 주관적·판단적 표현이 아닌 기술적(descriptive) 용어로 진술되어야 한다. 셋째, 학생이 학습 과정과 결과에서 자신의 진보를 성찰하고 그 증거를 분명히 표현할 수 있도록 현재 시제의 긍정적인 진술이어야 한다.
주의할 것은 여기서 수행수준 기술과 수행 예시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과제 중립성의 요구는 수행수준 기술, 즉 각 수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규정하는 일반적 진술에 적용되는 것이며 그 수준이 실제 학습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 주는 수행 예시(performance examples)나 평가 문항에는 구체적 소재와 과제 맥락이 포함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수행수준 기술은 어떤 과제에서도 일관되게 적용할 수 있는 인지적 수행의 질로 진술되어야 하고, 수행 예시와 평가 문항은 일반적 수준을 특정 단원의 소재로 맥락화한 것에 해당한다. 이러한 층위 구분은 형성평가와 총괄평가가 동일한 수준 준거를 공유하면서도 서로 다른 과제로 구현될 수 있게 하는 토대가 된다.
학습 진보도와 수행수준 기술은 역량의 가시화라는 목적에서 모두 사용될 수 있지만, 초점과 범위에서 구별된다. 학습 진보도는 학습자의 이해가 장기간에 걸쳐 질적으로 변화하는 종단적 발달 궤적을 기술하는 데 초점을 두며, 수행수준 기술은 특정 단원이나 평가 과제의 맥락에서 학습자의 수행이 드러내는 인지적 복잡성의 차이를 횡단적으로 구분하는 데 초점을 둔다. 전자가 ‘어디에서 어디로 향해 가는가’라는 발달의 방향성에 관한 것이라면, 후자는 ‘지금 여기에서 어떤 수준의 수행을 보이는가’라는 현재 상태의 질적 판별에 관한 것이다.
이 두 개념은 상호 보완적 관계에 있다. 학습 진보도가 어떻게 학습이 발전하는가에 관한 이론적·경험적 기술을 제공한다면, 수행수준 기술은 진보도의 각 지점에서 학생의 수행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명시한다(Hess et al., 2020, pp. 84-86). 학습 진보도가 제시하는 발달의 전체 지도 위에서 수행수준 기술은 특정 학습 시점에서 학습자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표시하는 좌표 역할을 한다. 교사가 단원을 설계할 때 학습 진보도는 해당 단원에서 다루는 개념적 이해가 학습자의 장기적 발달 경로 가운데 어디에 놓이는지를 파악하게 해 주며, 수행수준 기술은 단원의 학습 목표에 비추어 학습자의 현재 수행수준을 정교하게 판별하고 피드백을 제공하는 근거가 된다(Heritage, 2008, pp. 6-7).
이처럼 학습 진보도와 수행수준 기술이 맞물릴 때 교사는 교육과정 설계, 수업, 평가의 전 과정에서 일관된 준거를 갖게 되고(Heritage, 2008, p. 6), 학습자는 자신의 현재 위치와 다음 단계를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정합성은 평가 설계를 뒷받침한다. 수행수준 기술이 단원, 평가 및 채점 준거와 긴밀히 연계될 때 학습자의 수행 증거가 척도의 어느 수준에 해당하는지가 분명해지며, 증거를 토대로 각 수준의 기술을 점검·수정함으로써 평가가 측정하고자 하는 바와 학습 진보도의 정렬, 즉 평가의 타당성이 견고해진다(Hess et al., 2020, pp. 88-89).
학습 진보도와 수행수준 기술이 학교 교육의 질적 개선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는 효과는 교수·학습 설계, 형성평가와 피드백, 학습자의 자기평가와 주도성의 세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교수·학습 설계의 일관성과 정교성을 높일 수 있다. Heritage(2008, pp. 5-6)에 따르면 잘 구성된 학습 진보도는 교사에게 세 가지 측면에서 수업 설계를 지원한다. 학생이 무엇을 할 것인가(학습 활동)보다 무엇을 배울 것인가(학습 목표)에 집중하게 하고, 특정 학습 목표의 앞뒤에 무엇이 오는지를 단기·장기에 걸쳐 조망하게 하며, 학생의 현재 위치를 파악하여 적절한 다음 단계를 정하게 한다. Heritage(2008, pp. 11-13)는 하와이주의 진보도 개발·활용 사례를 통해 학습 진보도를 활용한 교사들이 형성평가와 수업 전략, 학생의 필요에 맞춘 수업 수정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되었다고 보고하며, 학습 진보도가 교사의 수업 전문성 향상에 기여할 수 있음을 언급하였다.
둘째, 형성평가의 질을 높이고 피드백의 구체성을 강화할 수 있다. 학습 진보도는 형성평가의 핵심 요소와 긴밀히 연결된다(Heritage, 2008, pp. 6-7). 교사는 학습 진보도에 명시된 준거에 근거하여 학생의 수행을 해석하고, 현재 수준과 목표 사이의 간격을 파악하여 수업을 조정할 수 있다. 수행수준 기술은 이 과정에서 교사가 학습자의 수행을 관찰할 때 무엇이 잘 되고 있는지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구체적으로 판별하는 근거를 제공한다(Hess et al., 2020, pp. 95-96). Popham(2007, pp. 83-84) 역시 형성평가가 가장 효과적으로 기능하려면 교사가 평가에 기반한 수업 조정의 적절한 시점을 파악할 수 있는 틀로서 학습 진보도를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셋째, 학습자의 자기평가 역량과 주도성을 촉진할 수 있다. 학습 진보도와 수행수준 기술은 학습자에게 자신이 도달해야 할 목표를 분명히 제시함으로써, 현재 위치에서 더 능숙해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진보에 필요한 전략과 지원을 교사와 동료에게 요청할 수 있게 한다(Hess et al., 2020, pp. 95-96). 역량 기반 교육의 실행을 검토한 Evans 외(2020, p. 13)의 문헌 분석에서도 학생이 학습 진보도 위에서 자신의 위치와 진보를 추적할 수 있도록 명확한 절차와 도구를 제공하는 것이 실행을 촉진하는 핵심 요인 가운데 하나로 확인되었다.
IV. 역량의 가시화를 위한 단원 설계 원리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면 역량의 가시화를 위해 교사의 단원 설계가 공유해야 할 원리를 다음 네 가지로 도출할 수 있다. 이는 학습 진보도와 수행수준 기술에 관한 이론적 검토를 통해 도출된 것으로 단위학교 교사가 성취수준을 개발하고 단원을 설계할 때 무엇을 준거로 삼아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 될 수 있다. 네 원리 가운데 앞의 세 가지가 성취수준의 대상과 수준 구분의 기준, 진술의 형식을 규정한다면, 마지막 원리는 이 세 요소를 하나로 묶어 작동시키는 설계의 논리에 관한 것이다. 학습 진보도와 수행수준 기술이 본래 지향하는 바는 교육과정, 교수·학습, 평가를 정합할 수 있는 연결에 있으며(Duncan & Hmelo-Silver, 2009, pp. 606-607; Heritage, 2008, p. 6), 두 도구가 제공하는 일관된 준거는 단원 설계가 그 준거를 출발점으로 삼아 평가와 수업을 역방향으로 조직할 때 교육과정, 교수‧학습, 평가의 정합성이 실현된다. 이 점에서 백워드 설계(backward design)는 두 도구의 가시화 기능이 단원 설계로 구현되는 절차에 해당한다.
첫째, 성취수준 설정의 대상을 개별 성취기준의 내용 요소가 아니라 단원 수준에서 도출한 일반화에 둔다. 이는 역량이 전이 가능한 이해를 본질로 한다는 점, 그리고 학습 진보도의 상위 정착점이 핵심 아이디어와 깊이 있는 개념적 이해에 대응한다는 점에서 요청된다(Erickson & Lanning, 2014; Hess, 2008; Wiggins & McTighe, 2005).
둘째, 수준 구분의 기준을 학습 내용의 양적 차이가 아니라 인지적 복잡성의 위계에 둔다. 수행수준이 단순 회상에서 개념적 이해, 추론·분석, 확장된 사고로 나아가는 인지적 복잡성의 질적 차이로 기술될 때, 수준 사이의 차이가 더 많이 아는가가 아니라 더 깊이 사고하고 더 넓게 적용하는가의 관점에서 드러난다(Hess et al., 2020, pp. 77-78; Webb, 2002).
셋째, 각 수준의 수행 지표를 특정 과제에 종속되지 않는 과제 중립적·기술적·긍정적 진술로 작성한다. 다만 앞서 논의하였듯이 이 요구는 수행수준 기술 자체에 적용되며, 수준을 예증하는 수행 예시와 평가 문항은 특정 단원의 소재로 맥락화될 수 있다. 이로써 동일한 수준 준거가 형성평가와 총괄평가의 서로 다른 과제로 일관되게 구현될 수 있다(Hess et al., 2020, pp. 95-96).
넷째, 교육과정, 교수·학습, 평가를 백워드 설계의 논리에 따라 정합성을 갖추어 연결한다. 앞의 세 원리가 규정한 일반화·인지적 복잡성·과제 중립적 진술은 단원 설계가 일반화를 먼저 설정하고 이를 확인할 평가 증거와 수행수준을 설계한 뒤 그에 비추어 교수·학습 활동을 조직할 때 하나의 준거 위에서 정렬된다. 이는 학습 진보도가 본래 지향하는 교육과정·교수·평가의 정합성을 단원 차원에서 실현하는 절차이다(Duncan & Hmelo-Silver, 2009, pp. 606-607; Looney, 2011, p. 5; Wiggins & McTighe, 2005, pp. 17-19). 이상의 네 원리를 정리하면 <표 3>과 같다.
V. 설계 원리의 구현 예시
본 장에서는 Ⅳ장에서 도출한 네 가지 설계 원리가 실제로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각 예시는 원리를 경험적으로 검증하려는 것이 아니라 같은 원리가 서로 다른 층위에서 활용되는 양상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하나는 교육과정·평가 체제 차원에서 두 도구의 관계를 구현한 호주 빅토리아주 교육과정·평가청(VCAA)의 형성평가 루브릭 가이드이고, 다른 하나는 2022 개정 사회과 교육과정을 바탕으로 작성한 사회과 단원 설계 사례다.
호주 빅토리아주 교육과정·평가청(Victorian Curriculum and Assessment Authority, VCAA)은 빅토리아 교육과정(Victorian Curriculum F-10)과 연계한 형성평가 루브릭 개발 지침서를 발간하였다(VCAA, 2019). 이 지침서는 학습 연속체(learning continuum)와 형성평가 루브릭(formative assessment rubric)을 통합하여 교사가 단원 설계에 활용할 수 있도록 구체적 절차와 예시를 제공한다.
지침서는 두 가지 측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학습 연속체는 교과 교육과정에서 도출한 지식과 기능의 발달 단계(phases)를 기술한 것으로, 학생이 특정 영역에서 더 능숙해지면서 거치는 전형적인 발달 단계를 나타낸다(VCAA, 2019, pp. 4-5). 교사는 이를 통해 증거 수집의 방향을 설정하고, 수집한 증거를 해석하여 학생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준비가 되었는지 판단하며 후속 교수·학습 활동을 설계한다. 이는 Heritage(2008, pp. 2-3)의 학습 진보도 개념에 상응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형성평가 루브릭은 이 연속체의 각 단계에서 학생의 수행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기술한 것으로 수행수준 기술에 해당한다.
이 지침서를 앞서 도출한 네 원리에 비추어 보면 다음과 같다. 원리 1(일반화 중심의 성취수준 대상 설정)과 관련하여 빅토리아 교육과정은 학년이 아니라 학습 성취 수준의 연속체로 구조화되어 있다(VCAA, 2019, pp. 4-5). 이에 따라 수준 구분의 대상은 학년별로 배정된 내용 요소의 습득이 아닌 발달 경로 위의 능숙도, 곧 개별 내용 요소를 관통하는 상위 준거에 놓이며, 이는 성취수준의 대상을 일반화에 두는 원리 1이 교육과정 체제 수준에서 구현된 형태에 해당한다. 원리 2(인지적 복잡성에 근거한 수준 구분)와 관련하여, VCAA(2019, p. 11)는 루브릭이 수행의 양적 빈도가 아니라 질적 정교성의 증가를 기술해야 한다고 명시한다. 정교성이란 어떤 일을 얼마나 자주 올바르게 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잘했는가에 관한 것이며, 각 수준은 더 나은 방식의 수행을 기술해야 한다. 원리 3(과제 중립적 진술과 수행 예시의 맥락화)과 관련하여 VCAA(2019, p. 15)는 형용사와 부사를 제거하고 단계 간 차이를 드러내는 동사를 중심으로 기술할 것, 모든 준거를 긍정적으로 진술하여 학생이 아직 달성하지 못한 수행을 결여로 표현하는 대신 다음 수준의 도달 기대로 포함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Hess 외(2020, pp. 95-96)가 제시한 기술적·긍정적 진술 기준을 구체적 실천 지침으로 구현한 것이다. 원리 4(백워드 설계를 통한 정합)와 관련하여, 지침서는 루브릭 개발을 증거 수집에서 증거 해석을 거쳐 교수·학습 계획으로 이어지는 순환 과정과 명시적으로 연결함으로써(VCAA, 2019, pp. 3, 16-20), 수행수준 기술이 형성평가의 순환 구조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체계적으로 드러낸다.
이 예시는 학습 진보도와 수행수준 기술의 원리가 개별 교사의 단원 설계를 넘어 교육과정·평가 체제 차원의 교육과정 문서에 반영될 수 있으며, 거시적 진보도와 미시적 수업 설계를 잇는 실천적 절차로 구체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다음은 학습 진보도와 수행수준 기술을 적용하여 초등학교 3학년 사회과 ‘옛날과 오늘날의 생활 모습(교통·통신)’ 단원을 설계한 것이다. 이 단원 설계는 연구자가 도출한 네 원리에 따라 직접 개발한 사례로 원리가 실제 단원으로 구체화될 수 있음을 보이는 예시의 성격을 지닌다. 단원 설계안은 교육과정을 전공하고, 교육과정 설계 관련 정책 연구와 집필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초등교사 3인(박사 및 석사)에게 검토받았다. 검토기준은 ‘일반화 진술 타당성, 수행수준 간 위계의 논리성, 수행 예시의 적합성, 수행수준 기술의 과제 중립성 충족 여부’이며, 검토는 서면으로 진행되었다. 검토 의견에 따라 단원 핵심 아이디어 및 수행수준(1수준)의 모호한 용어를 수정하고, 3, 4수준 수행수준을 3학년 수준에 맞게 조정하였다.
원리 1(일반화 중심의 성취수준 대상 설정)과 관련하여 단원 설계는 성취수준 설정의 대상을 단원 수준의 일반화에 둔다. 이 단원은 <표 4>에 제시한 바와 같이 [4사04-02], [4사04-03]의 두 성취기준을 다루되 수준 구분의 대상을 개별 성취기준의 내용 요소가 아니라 단원 목표로서의 일반화에 둔다. 단원의 핵심 아이디어는 세 가지 일반화로 구성하였으며, 수행수준은 개별 내용 요소의 습득 여부가 아니라 이 일반화에 도달해 가는 정도로 진술된다.
원리 2(인지적 복잡성에 근거한 수준 구분)와 관련하여 수준 구분을 인지적 복잡성의 위계에 둔다. 일반화를 향한 수행수준은 1수준에서 4수준에 이르는 네 단계로 구성되며, 각 수준은 다루는 내용의 양이 아니라 사고의 인지적 복잡성에 따라 구분된다(<표5>). 1수준은 단원의 어휘를 사용한 정확한 표현(회상), 2수준은 변화 양상의 파악과 원인과 결과 관계의 설명, 3수준은 구체적 사례와 근거를 통한 정당화 및 일반화 표현, 4수준은 구성한 일반화의 미래 맥락으로의 전이와 비판적 성찰, 그리고 새로운 탐구 질문의 생성으로 위계화된다. 이는 단순한 회상에서 개념적 이해, 전략적 사고, 확장된 사고로 나아가는 Webb(2002)의 DOK를 반영한 것이다.
원리 3(과제 중립적 진술과 수행 예시의 맥락화)과 관련하여 수행수준 기술의 과제 중립성과 수행 예시의 맥락화가 나타난다. 이 단원 설계에서 주목할 점은 수행수준 기술과 수행 예시가 층위를 달리하여 작성되었다는 것이다. <표 5>의 수행수준 기술은 ‘인과 관계로 설명한다’, ‘하나의 일반화로 표현한다’, ‘미래 맥락에 전이한다’와 같이 특정 소재에 종속되지 않는 과제 중립적 진술로 기술되어 어떤 사례를 다루든 일관되게 적용할 수 있다. 반면 각 수준의 수행 예시(<표 6>)와 평가 문항은 이 일반적 수준을 봉수와 재난 문자의 비교, 정조대왕 능행차 분석, 드론 택시의 미래 예측과 같은 단원의 구체적 소재로 맥락화한 것이다. 가령 2수준의 과제 중립적 기술인 ‘수단의 변화와 생활 모습의 변화 사이의 관계를 설명한다’는 ‘옛날 봉수와 오늘날 재난 문자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하기’와 같은 구체적인 자기평가 활동으로 구현된다. 이러한 구분은 동일한 수준 준거가 형성평가(수업 중 관찰·자기평가)와 총괄평가(수행형 과제)에서 서로 다른 과제로 일관되게 적용될 수 있게 하는 토대가 된다.
원리 4(백워드 설계를 통한 정합)와 관련하여 백워드 설계에 따른 정합성이 나타난다. 이 단원은 교육과정 분석에서 출발하여 단원 일반화 설정, 평가 기준과 수행수준 기술, 평가 및 자기평가 도구 개발, 수업 설계로 이어지는 백워드 설계의 논리를 따른다. 단원은 무엇을 이해하게 할 것인가(1단계), 어떤 증거로 역량을 확인할 것인가(2단계), 어떻게 탐구 과정을 조직할 것인가(3단계)의 순서로 구성되며, 단원의 핵심 질문(교통과 통신수단의 변화는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어떻게 바꾸는가 등)이 학습 전반을 관통한다. 특히 평가 설계에서 형성평가(수업 중 관찰·학생 자기평가)와 총괄평가(수행형 과제)가 동일한 수행수준 준거를 공유하도록 설계되었고, 학생 자기평가 목록이 각 수행수준과 명시적으로 연계되어 학생이 자신의 현재 위치와 다음 단계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예를 들어 4수준 자기평가 항목인 ‘배운 일반화를 바탕으로, 미래에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 달라질 생활 모습을 이유를 들어 예측하기’는 4수준 수행수준 기술 및 4수준 수행형 평가 문항(예: 미래 생활 보고서)과 일관되게 연결된다.
VI. 결론 및 제언
본 연구는 역량 기반 교육을 지향하는 2022 개정 교육과정을 배경으로 교과 학습을 통해 역량을 가시화하는 방법으로서 학습 진보도와 수행수준 기술의 의미와 기능을 이론적으로 탐색하고, 이를 토대로 역량 가시화를 위한 네 가지 설계 원리를 도출하였다. 이론 종합을 통해 역량의 가시화란 추상적으로 규정된 역량을 관찰·평가 가능한 수행의 양상으로 구체화하는 작업임을 밝히고, 학습 진보도는 학습의 종단적 발달 궤적을, 수행수준 기술은 특정 시점의 횡단적 수행수준을 기술함으로써 두 도구가 상호 보완적으로 역량을 가시화함을 논증하였다. 또한 도출된 설계 원리가 교육과정·평가 체제와 교사의 단원 설계라는 두 층위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 호주 빅토리아주 VCAA의 형성평가 루브릭 가이드와 사회과 단원을 예시로 보였다. 이상을 바탕으로 도출한 시사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역량의 가시화를 위해서는 성취수준 설정의 대상을 재정립해야 한다. 앞서 논의하였듯이 ‘안다·이해한다’ 중심의 성취기준 진술과 내용 요소를 수준 구분의 준거로 삼은 성취수준은 깊이 있는 이해와 전이라는 역량의 특성을 담아내는 데 한계를 보였다(백남진, 2014; 윤지영, 온정덕, 2025). 이 한계를 넘어서려면 성취수준 개발의 대상을 개별 내용 요소에서 단원 수준의 일반화로 옮기고, 수준 구분의 근거를 사고의 깊이에 두어야 한다. 본 연구가 제시한 통합적 분석틀과 네 가지 설계 원리는 이 전환을 단원 설계의 절차로 옮길 때 활용할 수 있는 구체적 준거가 된다.
둘째, 수행수준 기술과 수행 예시·평가 문항은 층위를 구분하여 개발되어야 한다. 특정 소재를 수준 진술 자체에 고정하면 수행 지표의 과제 중립성(Hess et al., 2020, pp. 95-96)이 무너져 그 소재를 다루지 않는 상황에 같은 기준을 적용하기 어렵고, 형성평가와 총괄평가 사이의 일관성도 약화된다. 따라서 수행수준 기술은 ‘인과 관계로 설명한다’거나 ‘여러 사례에서 공통된 패턴을 찾아 일반화로 표현한다’와 같이 어떤 과제나 맥락에서도 관찰·적용할 수 있는 인지적 수행의 질적 특성으로 진술하고, 봉수와 재난 문자의 비교나 드론 택시의 미래 예측과 같은 구체적 소재는 수행 예시와 평가 문항의 층위에서 다루어야 한다.
셋째, 본 연구가 예시한 네 수준의 수행수준 구성은 현행 성취평가제의 다섯 수준(A~E) 체제와 두 차원에서 연계될 수 있다. 네 수준은 DOK의 위계를 반영한 것일 뿐 수준의 수 자체를 규정하는 것은 아니며, 본 연구가 제안하는 바의 핵심은 수준의 개수가 아니라 수준을 가르는 기준을 인지적 복잡성에 두는 데 있다. 먼저 국가 차원에서 성취평가를 위한 기준과 수준을 개발·보급할 때 다섯 수준의 구분 기준을 내용 요소의 양적 차이가 아니라 인지적 복잡성에 둘 수 있다. 가령 각 수준을 확장된 사고와 전이(A), 전략적 사고(B), 개념·기능의 적용(C), 회상·재생 수준의 수행(D), 부분적 도달(E)로 기술하면 다섯 수준 체제 안에서도 동일한 원리가 작동한다. 다음으로 단위학교 차원에서는 단원에서 인지적 복잡성에 근거한 루브릭으로 형성평가와 피드백을 운영하고, 학기 단위로 성취수준을 산출할 때 미리 정한 변환 규칙에 따라 A∼E 등급과 연결할 수 있다. 질적 위계에 기반한 척도와 보고용 등급 체계가 변환 규칙을 매개로 병행될 수 있음은 숙달 척도를 활용하는 해외 실천에서도 확인된다(Marzano & Abbott, 2022, pp. 152-156; Marzano, Aschoff, & Avila, 2022, pp. 200-207). 다만 어느 차원에서든 성취율에 기반한 현행의 양적 구분과 인지적 복잡성의 질적 위계 사이의 정합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는 후속 연구의 과제로 남는다.
넷째, 학습 진보도와 수행수준 기술의 실천적 개발을 위한 체계적인 교사 지원이 필요하다. 단원 설계에서 일반화를 도출하고 인지적 복잡성에 근거하여 수행수준을 기술하며 그 수준을 다양한 평가 과제로 맥락화하는 일은 교과 내용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인지적 엄격성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는 전문적인 작업이다(Heritage, 2008, pp. 5-7). 이는 단순한 양식이나 절차의 제공을 넘어 교사가 일반화와 인지적 복잡성의 관계를 깊이 이해하고 자신의 교과와 단원에 맞게 두 도구를 직접 개발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르는 전문성 개발 체계로 이어질 필요가 있다.
본 연구의 의의와 한계는 다음과 같다. 이론적으로 본 연구는 주로 과학 교과를 중심으로 축적되어 온 학습 진보도와 수행수준 기술 논의를 2022 개정 교육과정의 성취수준 문제와 연결하여 단위학교의 성취수준 개발에 적용할 수 있는 네 가지 설계 원리로 종합하였다. 이는 그동안 국내에서 개별 개념의 발달 경로를 경험적으로 타당화하는 데 집중되어 온 학습 진보도 연구를 일반 교과의 단원 설계와 성취수준 개발이라는 실천적 과제로 확장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본 연구는 이 원리가 교육과정·평가 체제와 교사의 단원 설계라는 서로 다른 두 층위에서 일관되게 구현될 수 있음을 두 예시를 통해 보임으로써 설계 원리의 구현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두 예시가 보인 것은 원리의 효과가 아니라 적용 가능성이며, 특히 사회과 단원은 연구자가 원리에 따라 설계한 사례라는 한계를 지닌다. 적용 가능성은 추상적 역량 담론과 교사의 실제 수업 설계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준거를 마련하여 후속 실행 연구의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니지만, 동시에 본 연구의 한계가 자리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역량 기반 교육은 교육과정 문서에 역량을 명시하는 것만으로 실현되지 않으며, 추상적인 역량을 관찰 가능한 수행으로 가시화하는 도구와 절차를 요구한다. 학습 진보도와 수행수준 기술은 학습의 발달 경로와 그 경로 위의 수행수준을 함께 기술함으로써 역량을 가시화하고, 교육과정, 교수·학습, 평가를 정합하게 하는 준거를 제공한다. 본 연구가 도출한 설계 원리가 단위학교의 성취수준 개발과 단원 설계에 실질적으로 활용될 때, 역량 기반 교육은 이념의 차원을 넘어 교실의 실천으로 구현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