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 론
북한이라는 타자는 늘 우리의 삶에 실존적인 주제로 함께 하고 있다. 북한이라는 주제가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순간도 있지만 대체로 이러한 주제를 깊이 고민하기보다는 언론을 통해 접하고 나면 이내 다른 주제에 눈을 돌리게 된다. 이러한 타자로서의 북한에 관해서 깊이 천착하는 것은 모두에게 쉽지 않은 과제이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북한이라는 타자가 우리의 삶에 너무나 깊숙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기에 이 점에 관해서 생각하는 것이 괴롭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이 현재의 우리 삶과는 괴리된 존재라고 치부하는 것이 고통을 회피하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또 다른 이유 중의 하나는 북한이라는 타자를 정치세력의 결집을 위해 이용하는 집단과 논쟁을 일으키지 않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즉, 북한이나 분단, 통일 등을 이야깃거리로 삼는 순간 ‘그래서 너는 어느 편이냐’라는 물음에 직면하고 또 답해야 할 것만 같은 부담을 느끼기에 거리를 두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북한, 분단, 통일이라는 주제는 한껏 피하고자 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주제도 아니고 우리의 삶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에 직면해야만 하는 무언가일 것이다.
본 연구는 북한이라는 타자에 관한 인문학적 연구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여러 지역에서 열리는 현장 교사와의 강의나 연수와 같은 소통의 장에서 도덕교육의 전반적인 주제들에 관해서 의견을 받을 때 통일교육에 관한 질문이 가장 많았다. 통일교육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의견 혹은 질문에 대해 나름대로의 답변을 하면서도 이러한 어려움을 어떻게 함께 풀어나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확신하기 어려웠다. 특히, 정부가 바뀔 때마다 통일에 대한 기조가 달라지고 그에 따라 통일교육의 강조점도 달라지는 현 상황에서 이러한 변화를 직면하고 도덕 수업으로 온전히 소화해 내야 하는 어려움에 대해 깊이 공감하기 때문에 더욱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본 연구자 역시 도덕교사로 재직하던 시기에 통일에 대한 정부의 입장이 순식간에 변하는 것을 수차례 지켜보면서 점차 통일교육에 대한 열의가 줄어드는 것을 체험했다. 또, 언론에서 북한에 대한 소식을 접한 학생들이 질문을 할 때마다 분단과 통일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하고 답변을 해야 하는가에 관해서 곤란함을 느끼기도 했다. 더구나 모든 교사는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기에 교사로서의 답변은 민감한 내용이나 핵심을 피해가거나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말하는 것 정도의 수준을 넘어서기 어려웠다.
이와 같이 곤란함은 통일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사람들의 관심이 통일이라는 주제와 시시각각 멀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조사 결과에 의해서도 이러한 현상은 확인되고 있다. 통일에 대한 인식은 기성세대에 있어서는 출신 지역, 이념성향, 교육수준, 성별 등의 변수에 따라 좌우되었지만, 90년대 이후에 태어난 소위 Z세대의 경우는 지역 갈등 변수와 성별 변수만이 통일 인식에 영향에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기성세대 집단 내에서는 연령이 낮을수록 통일이 불필요하다고 느끼지만 Z세대 집단 내에서는 연령이 높을수록 통일이 불필요하다고 여기는 확률이 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김택빈, 2024: 185). 또, Z세대 내에서는 소득수준이 높을수록, 미혼일수록 통일에 무관심할 확률이 높은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김택빈, 2024: 189). 이러한 결과는 기성세대가 이념이나 교육 수준 등의 여러 변수에 의해서 통일에 대하여 예측 가능한 인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에 비해서 Z세대는 어떤 출신 지역인지, 어떤 이념을 가지고 있는지, 교육수준이 어떠한지 등에 의해서 통일 인식이 좌우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또, Z세대 내에서 연령이 높을수록 통일이 불필요할 것이라는 인식이 높아진다는 점은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통일교육과 멀어지게 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으며, 연령이 높아질수록 상대적으로 통일에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이 쉽사리 달라질 것이라고 낙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그렇기에 통일교육에 있어서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할 것이며, 새로운 관점에서 북한을 바라보고 통일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하는 교육적 시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논의의 물꼬를 튼 것은 변종헌의 선행연구이다. 변종헌은 반통일 정서의 극복을 위해서 통일책임론을 제시하면서 이러한 논거가 레비나스의 타자윤리를 토대로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변종헌, 2016: 121-146). 이는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윤리적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서 통일에 대한 책임을 구상하는 것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선행연구의 성과를 이으면서 타자윤리를 통해서 통일과 통일교육에 접근해야 하는 이유에 관해서 살펴보고, 이 타자가 왜 북한이라는 타자이어야 하는지, 이 책임이 어떻게 발생하는지에 대해서 보충하고자 한다.
특히, 통일교육의 접근법이 통일 이후에 기대되는 경제적인 효과나 지정학적 위치에서 오는 이점의 극대화 등에 대한 논의로 구체화되면 될수록 학생들에게 통일은 기대효과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될 여지가 많아지게 된다. 물론, 통일교육의 논의에서 이러한 접근 또한 통일 이후의 미래상을 논의하기 위해서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통일교육에서 경제적 측면에서의 이점은 통일의 중요한 여러 이유 중의 하나로 논의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나 가장 기대되는 이유로 부각되는 것이 된다면 오히려 통일교육의 논의에 대한 깊은 사유와 열망을 불러일으키기에 적절하다고 말하기 어려울 수 있을 것이다. 통일이 불러올 장기적인 경제 이익에 대한 기대는 자신의 세대에서의 통일 반대하는 이유로도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현 세대가 통일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비용과 다음 세대가 얻게 될 이익에 대한 비교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본 논의는 통일교육이 가질 수 있는 또 다른 측면의 논거인 인문학적 접근을 모색하고자 한다. 아울러, 이러한 논의의 초점을 타자윤리가 가지고 있는 존재론적 측면에서 비롯되는 윤리적 논거로 집중하고자 한다. 통일교육의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제시하기에 앞서서 이러한 실천의 토대가 되는 사유가 타자의 존재론적 층위라는 점에 착안하여 논의를 전개하고 나아가 타자윤리가 적대적 관계 속에서도 윤리성을 사유하고자 하며, 응답의 가능성을 이어가고자 한다는 점에서 윤리적 층위의 논의로 나아가고자 한다. 통일교육의 정치적이고 실천적인 논의 이전에 필요하다고 할 수 있는 타자윤리적 상상력에 기초한 존재론적 의미를 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인문학적 사유에 기초하여 통일교육이 어떠한 관점에서 북한이라는 타자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에 관해서 논의를 시도하고자 하며, 특히, 존재론적 측면에서 북한이라는 가장 가까우면서 알지 못하는 타자를 타자윤리에서의 타자로 치환할 필요성에 관해서 논의하고자 한다. 이때의 타자는 그러한 시도의 일환으로 통일교육의 인문학적 접근이 무엇이며 어떠한 이론적 기반에서 이러한 접근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에 관해서 논의하고자 한다.
Ⅱ. 통일의 인문학적 근거로서의 타자윤리
타자윤리는 그간의 서양윤리가 자아의 주체성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온 것에 대해서 비판적 입장을 취하며, 타자를 중심으로 윤리학을 복원하고자 시도한다. 이러한 점에서 타자윤리는 존재론적 논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존재 담론이 존재자에 대한 전체화 시도를 담고 있다고 고발하는 한편 주체의 능동성 담론을 탈중심화하여 재편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 독특성을 유지하고 있다. 레비나스는 전체주의의 폭력에서 벗어나고자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를 모색하게 되었고 자신이 몸서리치게 체험한 바 있는 폭력의 문제를 타자윤리를 통해 풀어내고자 했다. 그리하여 본 연구에서는 타자윤리의 선구자이자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논의를 중심으로 타자와 윤리의 의미가 무엇이며, 타자와 윤리의 연결을 어떻게 실현하고자 하는가에 관해 고찰하고자 한다. 특히 레비나스의 논의 중에서 통일 및 통일교육의 인문학적 근거로 작동할 수 있는 타자의 근접성과 초월성, 유책성과 얼굴의 윤리 등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레비나스는 윤리가 어떻게 성립하는가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타인의 현전이 나의 자발성을 문제 삼는 것을 윤리라고 한다. 타인의 낯섦은 바로 나의 자발성을 문제 삼는 것으로서, 윤리로서 성취된다(E. Levinas, 1961: 43). 즉, 타인이 내 앞에 현전하고 있음 그 자체가 자아의 자발성을 문제 삼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타인은 나에게 낯선 자이며, 낯설다는 그 이유 자체가 자아로 하여금 문제를 일으킨다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타자윤리가 말하고자 하는 타자가 우리 앞에 있다는 그 이유만으로 우리의 자유와 자발성을 제한하는 존재라는 점을 알 수 있다.1)
이러한 타자는 자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 타자는 자아와 항상 이미 근접해있지만 그러한 가까움 속에서도 대화와 소통을 통해서도 좁혀지지 않는 낯섦을 유지한다는 특징을 가진다. “대화는 나와 타인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며, 전체성의 재구성을 방해하는 근본적인 분리를 유지한다(E. Levinas, 1961: 38).” 이를 통해서 우리는 타자가 자아와의 거리 속에서 분리를 유지하면서도 대화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가장 가깝지만 가장 알 수 없는 존재로서의 타자가 상정되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 중의 하나는 자아가 아무리 자신의 인식을 동원해서 노력한다 해도 그렇게 이해한 타자는 이미 타자 그 자체가 아니라 자아가 재구성한 타자일 뿐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근접성 속의 분리가 있기에 타자는 마치 우리의 피부에 외상을 입히듯이 우리에게 순식간에 닥쳐오게 된다.
“근접성과 의사소통의 얽힘은 인식의 한 양상이 아니다. … 그것은 자기의 위험을 감내하는 발견에, 진정성에, 내면성의 단절과 모든 피난처의 포기에, 외상으로의 노출에, 상처받기 쉬움에 있다(E. Levinas, 1974: 111).” 우리는 인식을 통해서는 타자를 포착할 수 없으며, 오히려 자신이 타자에 의해서 위태로워졌음을 발견하고 이를 인정하고 타자로부터 도망치기를 포기하면서 근접성과 의사소통의 얽힘 속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타자와의 얽힘은 마치 우리의 피부가 외상에 노출되어 상처 입는 것과 같이 감성의 상처받기 쉬움에 의해서 체험된다. 이러한 타자에 의한 상처를 거부하거나 피할 수 없는 이유는 자아를 둘러싼 피부가 자아로 하여금 타자에 노출되도록 두기 때문이다. “고통의 가능성으로서, 본래 아픔을 겪는 감수성인 감성으로서 자신의 피부에 놓이는 것으로서, 자신의 피부에서의 아픔으로서, 자신의 피부를 자기로 갖지 못하면서 상처받기 쉬움으로서 말이다(E. Levinas, 1974: 117).” 그리고 자아가 가지는 이 아픔은 주체를 탈중심화 시킨다. 즉, 주체가 자신만의 세계를 향유하면서 안정감을 누리는 것을 지속적으로 방해해서 그 세계를 찢고 나오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탈중심화는 “주체의 폐-위(dé-position) 또는 탈-직(dé-situation)(E. Levinas, 1974: 109)”으로도 명명된다. 주체는 자신의 세계 속에서의 중심적 위치에서 내려와 타자 앞의 자아로 서야하기 때문이다.
자아에게 타자는 가장 가깝지만 가장 알 수 없는 존재이다. 감성의 주체로서의 자아에게 타자는 피부의 외상으로 알려질 만큼 가장 가까운 존재이지만 인식의 주체로서의 자아에게는 가장 알 수 없는 존재가 타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타자는 감성을 통해서 직접 알려진다. “감성의 직접성, 그것은 감성의 고유한 물질성이 가진 타자를-위함이고, 타자의 직접성 또는 근접성이다(E. Levinas, 1974: 163).” 자아는 감성의 물질성을 가진 존재 즉 몸을 가지는 존재이며 그렇기에 피부에서의 아픔과도 같이 타자와 얽히게 된다. 이와 같은 감성의 물질성에 의거한 자아와 타자의 접촉은 자아로 하여금 이미 항상 가까운 타자에 의해서 노출된 상태에 처하게 한다. 그렇기에 레비나스는 모든 봄은 접촉을 시사하고 이 봄에 의해서 자아는 존재에 대해 노출된다고 말한다(E. Levinas, 1974: 174).
아울러 이러한 타자와의 가까움은 오히려 자아로 하여금 자아가 자신 안에서 홀로 누리던 향유의 평온함을 흔들면서 느껴지고 감성적으로 가깝지만 인식적으로 완전히 파악될 수 없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하다. “근접성은 하나의 상태나 휴식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불안정이고, 비-장소이며, 휴식처의 바깥이다. 이것은 한 자리에서 휴식을 취하는 존재의 비-편재가 누리가 평온함을 뒤엎는다. 따라서 근접성은 포옹처럼, 언제나 불충분한 근접성이다(E. Levinas, 1974: 178).” 타자와의 근접성이 자아에게는 불충분할 수밖에 없다. 이 근접성은 자아의 감성을 향해 다가오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주체를 폐위시키고 중심적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기 때문이며, 그러한 탈중심화의 요구가 감성적인 것에 호소하기에 인식에 의해서는 온전히 파악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자아는 가까운 타자와 대등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마치 포옹하는 상대방이 나와 가장 가까운, 살을 맞댄 존재이지만 자아의 그러한 포획에도 상대방은 내가 알 수 없는 존재로 남아있는 것과 같이 타자와 자아는 일종의 관계 아닌 관계를 맺으면서 평행선을 유지하는 사이가 된다. “근접성은 다가가서 결국 관계를 이루는 주체다. 그 관계에 나는 항으로 참여하지만 거기서 나는 하나의 항 이상이거나 이하다. 이 초과 또는 이 부족은 관계의 객관성 밖으로 나를 내던진다(E. Levinas, 1974: 179).” 타자와 자아는 상호대등성이나 호혜성으로 설명될 수 없기에 이 둘의 사이는 관계라 칭해볼 수는 있지만 객관성을 담보하지 않는다. 자아는 타자의 요구에 의해서 탈중심화되어야 하지만 타자는 자아로 하여금 요구할 뿐이기 때문이다. 상호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혹은 그러한 상호성을 넘어서야 설명을 시도할 수 있는 관계이기에 자아는 하나의 항으로 그 관계 안에 있지만 늘 부족하거나 넘쳐서 타자를 향해 있으면서도 타자를 변화시킬 수는 없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타자의 특성이 곧 타자에 대한 자아의 책임을 있는 그대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아를 탈중심화하는 타자에 대해서 자아가 책임을 지니는 이유가 관계 아닌 관계를 맺고 있다는 설명만으로는 충분히 해명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절에서 타자라는 초월에 대해 자아가 책임, 그것도 일방적이면서 무한한 책임을 가지는 이유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레비나스는 자아가 타자에 대해 유책성을 가진다고 말한다. 이 유책성은 가까운 초월로서의 타자가 맞이하는 모든 사태에 자아가 책임을 가진다는 정도로 무겁고 또 무한하다. “나는 시작하기도 전에 강제된다. 여기에는 자기의식과 닮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개입에 앞서는 책임으로부터, 다시 말해 타인을 위한 책임으로부터 내게 솟아나는 의미만을 갖는 것. 나는 일자이고 대체 불가능하다(E. Levinas, 1974: 223).” 자아는 타자에 의해서 주체성의 독점적 지위를 박탈당하기에 강제되며, 타자 앞에서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존재가 되기에 대체 불가능하게 된다. 이와 같은 설명은 자아가 스스로 선택해서 타자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뜻한다. 하지만 여전히 타인에 대한 책임으로부터만 솟아나는 의미의 생성 자체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해명이 필요하다.
이때 가능한 설명 방식 중의 하나는, 근접성의 초월로서의 타자에게 자아가 응답하는 방법으로서 책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즉, 자아가 할 수 있는 것이란 타자의 타자성을 수용하는 것뿐이라는 점이다. “접촉하고 있음, 이것은 타인의 타자성을 없애려고 타인을 서임하는 것이 아니며, 타자 속에서 나를 지워버리는 것도 아니다. 접촉 자체에서는 만지는 자와 만져지는 자가 분리된다. 마치 만져지는 것이 멀어지는 것이고 이미 항상 타자여서, 나와 공통의 것이라곤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처럼. 마치 그것의 독특성—독특하기에 예측할 수 없고 결국 재현할 수 없는—이 응답하는 것은 가리킴에 대해서뿐인 것처럼(E. Levinas, 1974: 187).” 레비나스는 여기서 접촉을 통해서 다가오는 타자이기에 자아가 가깝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접촉되는 것과 접촉하는 자가 구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아와는 분리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제시한다. 타자와의 접촉이 자아에게 예측도 재현도 불가하다는 점은 그 관련이 아무리 반복되어도 언제나 항상 새로울 수밖에 없다는 점을 뜻한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독특한 관계성 안에서 자아는 자신이 이미 그 관계 안으로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된다. “근접성의 관계는 이미 소환이며, 극단적으로 긴급한 소환이다. 그것은 의무이고, 모든 약속에 시대착오적으로 앞서는 의무다(E. Levinas, 1974: 217).” 즉, 가까움과 초월이라는 이 양극단 사이에서, 자아는 반복될 수 없기에 늘 새롭고 예측할 수 없기에 늘 긴장하게 만드는 타자와의 접촉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접촉은 자아가 자발적으로 약속한 적 없는 의무 앞으로 자아를 소환한다. 고통 받는 타인 앞으로의 소환은 다른 무엇보다도 앞서는 긴급함을 가지며 자아가 수행한 자발적인 약속보다도 더 앞서는 의무로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소환 앞에서 자아는 그저 소환 받았다는 그 이유만으로도 응답해야 하는 의무를 지게 된다. “타자가 나를 문제 삼는다는 것은 나의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다(E. Levinas, 1993: 165).” 타자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자아의 책임을 요청하며, 타자는 어떠한 전조도 없이 자아 앞에 나타나 자아와 관련을 맺고 자아를 소환한다. 이러한 점에서 주체의 주체성은 사실상 타자에 의해서만 혹은 타자에 대한 책임에 의해서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자아가 가지는 유책성은 일종의 윤리적 자아로서의 가능성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자아는 자발적이거나 주체적으로 타자와의 접촉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긴급하게 타자 앞으로 소환되지만 이러한 책임의 떠맡음에 의해서 비로소 주체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앞선 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타인의 현전은 그 자체만으로 자아의 자발성을 문제 삼으며 이러한 문제 제기 앞에서 비로소 자아는 일자이며 대체 불가능한 자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선을 선택하기에 앞서, 선이 나를 선택했다. 누구도 자발적으로 선하지 않다. 선을 선택할 시간을 갖지 못하는 주체성, 그래서 결국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선의 광선으로 침투당하는 주체성(E. Levinas, 1974: 33)” 더 나아가 주체성의 역설은 비자발적으로 책임을 떠안은 자아를 선에 의해 선택당한 주체로 만든다. 타자와의 접촉을 수용하고 소환의 긴급성에 응답하는 자아는 이미 선에 의해 선택당한 것이며 자신에게 주어진 바의 책임을 받아들이는 자인 것이다. 그래서 자아의 책임은 오히려 자아가 성립하기 이전에 이미 성립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책임의 최초 운동이 질서를 기다리는 것에서도, 심지어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에서도 성립할 수 없고, 오히려 질서가 형성되기에 앞서 그 질서에 복종하는 것에서 성립할 수 있다는 식이다(E. Levinas, 1974: 38).” 책임의 성립은 자아의 성립에 앞서며 자아는 책임의 질서를 수용함으로서 자아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자아가 거듭난다고 표현하는 것은 향유 안에서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아가 책임의 질서 앞에서 윤리적 자아, 선에 의해 선택된 자아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설명 방식은 가까운 초월이라는 타자의 독특성을 타인이 겪는 사건에 대한 자아의 유책성과 결부시키는 것이다. 이는 타인이 겪는 구체적인 고통의 경험이 자아와 무관하지 않음을 강조하면서 시작된다. “모든 현재 및 모든 재-현 가능한 것 이편의 과거와 맺는 관계는, 그 과거가 현존의 질서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타자들의 잘못이나 불행에 대한 나의 책임이라는 비상하면서도 일상적인 사건 속에서, 타인의 자유에 책임을 지는 나의 책임 속에 포함되어 있다(E. Levinas, 1974: 32).” 타인이 겪은 사건들이 현존의 질서에 속하지 않는다면 나 자신의 자발적인 행위와 무관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겪은 고통에 대해 자아는 책임을 가진다. 이러한 책임은 타인이 우연히 마주한 불행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타인 스스로의 잘못으로 인해 빚어진 고통에 대해서도 유효하다. 그렇기에 자아의 책임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책임이라는 용어의 의미보다 그 의미가 더 포괄적이고 근원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자아의 현존 자체가 책임을 불러오며, 이 책임은 일상적으로 존립하면서도 일상적 의미를 넘어서는 비상함을 가진다. 타자가 겪는 사건들은 타자의 자유를 좌우하며 자연스럽게 자아의 자유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인간의 기억에 의거하지 않는 책임이자, 다른 인간의 자유와 운명에 좌우되는 처지의 책임이다(E. Levinas, 1974: 109).” 자아는 자신이 떠안은 책임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기에 책임의 성립은 인간의 기억에 의거하지 않는다. 또, 자아는 타자를 향한 책임을 떠안고 나서야 자아로 거듭나기에 그가 맡은 책임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향해있다. 아울러, 자아가 가지는 책임의 범위는 타인이 스스로 저지른 잘못, 즉 타인의 자유에서 시작하는 행동 및 타인이 우연히 겪는 사건에 의한 불행마저 포함하기에 자아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 및 운명에 의거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자아의 유책성은 타자의 죽음 혹은 필멸성 앞에서 극대화된다. “내 책임에 명해졌지만 내가 놓친, 잘못한 그-자신의 흔적, 그의 죽을 수밖에 없음이 내 책임이고 내가 살아남은 것이 내 죄인 듯한 그의 흔적‒이것이 얼굴이다(E. Levinas, 1974: 198).” 자아는 타인의 죽음 앞에서 자신이 대신 죽을 수 없음에 혹은 자신은 살아남았음에 책임을 통감하게 된다. 이는 타인이 겪는 모든 고난의 자리가 곧 자아의 자리임을 함축하는 것이다. 자아 또한 필멸의 존재자이기에 죽음 앞에서의 유책성은 그 어떤 것보다도 긴급하게 자아를 책임 앞으로 소환한다. 그렇기에 자아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자신이 행한 적도 없는 먼 과거의 행위와 행할 수 있었음에도 행하지 않는 현존의 행위에 책임을 가지는 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자아는 주체성의 지위를 박탈당할 자일뿐만 아니라 타자에 의한 볼모이자 인질과도 같은 지위에 있는 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조차도 우리는 타인의 고통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어떠한 감정과 의식을 가지게 되며 이 감정과 의식이야말로 자아를 볼모의 지위로 내몰고 무고한 자의 책임을 부여하는 것이다(E. Levinas, 1995: 128). 무고한 자의 책임은 무고하지 않다는 점에 있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그렇기에 유책한 자아는 타인의 호소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자아의 책임윤리가 어떻게 구체화되는가에 대해서 이어지는 논의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책임은 자아에게 감성적인 것의 직접성으로 다가오며, 이러한 책임이 가장 구체적이면서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나는 장소는 고통받는 타인 앞에서이다. “타인에로 향함은 타인을 위함에서, 그의 고통에 대한 고통에서 절정에 이른다(E. Levinas, 1974: 48).” 자아에게 타인의 고통은 자아의 자유를 제한하는 동시에 무고한 자의 책임을 느끼게 하는 가장 단적인 사건으로 다가온다. 타인의 고통이라는 사건 앞에서 자아 또한 고통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때의 고통은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 대한 탄식이며 어떠한 행위를 통해서도 온전히 속죄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에 대한 예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아의 고통은 고통받는 타인의 얼굴 앞에서 극대화된다. 타인의 얼굴이야말로 어떠한 대상보다도 더 직접적이고 강렬하게 자아의 책임을 통감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앞선 절에서 우리는 자아가 타인의 죽음 앞에서 느끼는 책임에 관해서 살펴보았다. 살아남은 자의 유책성을 드러내는 타자의 흔적은 그의 얼굴이다. “얼굴은 직관적 지향의 올곧음에 주어진 이미지의 직접성보다 더 팽팽한 무시원적 직접성이다(E. Levinas, 1974: 198).” 타인의 얼굴은, 대상을 바라볼 때의 지향과는 다른, 직접성을 가진다. 그 어떤 대상보다도 타인의 얼굴은 우리의 시선을 이끌고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강렬한 상을 남긴다. 이러한 얼굴의 직접성은 자아가 고립적으로 향유하는 세계 속에서 가지는 타자라는 추상적 상과는 다른 것이다. “타자가 내 안에 있는 타자의 관념을 넘어서면서 자신을 제시하는 방식을 우리는 얼굴이라고 부른다(E. Levinas, 1961: 56).” 자아는 자신의 시선으로 대상을 오롯이 포착하고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타자의 얼굴은 이를 거부하며, 자아의 시선이 포착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제시하고 그렇기에 시선의 포착으로 하여금 무력함을 느끼게 만든다. 그래서 타자의 얼굴은 자아가 가지는 타자의 관념을 초과하는 것이며, 이 초과함이 자아를 선함으로 향하도록 압박하는 힘을 가지는 것이다. 더구나 타인의 얼굴은 자아의 감성에 강렬하면서 직접적인 표현을 남기지만 자아의 시선으로 온전히 포착할 수 있을 만큼의 명료성을 주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항상 애매성을 지니는 이웃의 얼굴은 자아를 강박하고 부재의 흔적으로 남아, 깊게 파인 주름진 피부로 남는다(E. Levinas, 1974: 203). 이웃이 겪은 고통은 그의 얼굴에 주름으로 남아 자아를 향해 더없이 많은 것을 표현한다. 이러한 얼굴에 노출된 자아는 자신이 한 것, 하지 않은 것, 해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했던 것에 대한 책임에 노출된다. 타자의 얼굴은 이렇게 자아의 의식에 대상적인 명료성을 주지 않으면서 감성의 상처와도 같은 흔적을 남기기에 부재의 흔적이 된다(E. Levinas, 1974: 216).2)
그렇기에 타인의 얼굴은 자아에게 간청하고 호소하는 바로 그 장소가 되며, 주름진 피부가 외치는 표현은 말 없는 말로서 호소력을 가진다. 레비나스는 이런 의미에서 타인의 얼굴이 가지는 표현이야말로 아무런 저항도 없는 것의 저항이지만 윤리적 저항으로서의 힘을 가진다고 말한다(E. Levinas, 1961: 294). 이러한 윤리적 저항은 구체적이면서도 추상적인 대화이며 그 대화는 일방적이라는 점에서 표현의 초월성을 가진다.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이 최초로 건네는 말은 일종의 본래적 표현이며, 그 말의 내용은 ‘너는 살해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제시한다(E. Levinas, 1961: 294). 얼굴은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고 저항하지 않으면서도 저항하기에, 가장 고통받는 자의 얼굴이 가장 큰 호소력을 지닌다. 그렇기에 “초월적인 것은 낯선 자와 가난한 자이다(E. Levinas, 1961: 104).” 낯선 자와 가난한 자의 얼굴 앞에서 자아는 비로소 자아의 탈직과 폐위를 실현시키는 것이 타자임을 깨닫게 되고 주체성의 재구조화가 만들어낸 책임을 통감하게 된다. “빵을 맛보는 입에서 타인에게 주기 위해 빵을 뜯어낼 때처럼, 자아의 핵이 조직되는 향유의 탈핵화가 등장하는 것이다(E. Levinas, 1974: 143).” 자아는 타인의 고통 앞에서 자신의 먹거리를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자가 되고 자신의 세계 속에서 누리던 향유를 멈추고 타인의 표현에 응답하는 자가 된다.
이러한 향유의 탈핵화는 우리 자신에게 가까운 타자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응답이기도 하지만 육화된 주체이기에 가장 떠안기 어려운 책임일 수도 있다. 자신이 누리던 향유의 세계를 일시 중지하고 타인의 얼굴 속 고통을 마주하는 것만큼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이 없기 때문이다. “주체는 살과 피로 이루어진, 배고픈 인간이자 먹는 인간이고, 피부 안의 장기이며, 그래서 자신의 입에서 빵을 줄 수 있는 또는 자신의 피부를 줄 수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E. Levinas, 1974: 169).” 여기서 레비나스는 자신의 빵을 기꺼이 내어주는 자아의 몸짓을, 피부를 주는 것에 비유한다. 향유를 멈추는 자아의 행위는 육화된 주체만이 할 수 있는 선함을 보여주는 것이며, 자아가 할 수 있는 윤리적 관계 맺기의 시작이자 정점이다.
자아가 자신의 피부를 내어주는 것과 같은 선함을 행하는 것은 타인의 얼굴이 가지는 강렬한 호소를 차마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비토착인이고, 뿌리 뽑힌 자이며, 무국적자이고, 비-거주민이다. 계절의 추위와 더위에 노출되어 있는 자다. 내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는 것은 바로 이웃이 무국적임 또는 이방인임을 뜻한다(E. Levinas, 1974: 199).” 자아가 대면하는 타인은 고향을 잃은 자이며 고통 속에서 나에게 책임을 요구하는 사태 그 자체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가 겪는 추위와 더위에 무관할 수 없으며, 그의 얼굴이 표현하는 호소에 눈을 감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책임 앞의 자아는 타인의 호소에 응답하는 것만이 자신의 유책성과 직면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러한 응답으로서의 책임윤리는 일종의 역설을 가진다. “근접성이 좁혀지는 데 따라 주체와 타자 사이의 거리가 커지듯, 더 많이 응답할수록 더 많이 책임지는 주체(E. Levinas, 1974: 302).” 즉, 타인의 호소에 응답하면 할수록 자아는 더 많은 책임을 통감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탈핵화된 주체만이 가지는 윤리의 역설 혹은 책임의 역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자아는 타인의 고통 앞에서 함께 아파하고 타인의 약함 앞에서 타인으로 향하며, 자신이 떠안은 책임의 무게를 기꺼이 안고자 한다.
Ⅲ. 통일교육의 접근법으로서의 타자윤리
북한이라는 타자는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이웃일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타자윤리를 통해서 통일교육의 대상으로서의 북한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할 필요가 있다. 우리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타자 중에서 북한만큼이나 가장 가까우면서도 베일에 싸여있는 타자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본 논의는 이러한 북한의 타자적 특성을 수업에서 다룰 필요가 있다는 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즉, 학교 통일교육에 있어서 동기부여의 과정에서 북한에 대한 사유가 필요한 이유가 강조될 필요가 있다. 이는 단지 북한이라는 타자가 우리에게 위협적인 이웃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거나 하나의 민족으로서의 남한과 동질적인 타자라는 점을 강조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또 다른 측면에서의 동기부여를 시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동기부여는 우리가 북한이라는 타자에 대해서 가지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감정을 직면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즉, 일상에서 미디어를 통해 북한 소식을 접할 때 일어나는 감정에 대해서 거리두기를 시도해 봄으로써 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예컨대, 북한이 가까운 이웃이라는 점과 가장 먼 이웃이라는 점이 동시에 성립하는 이유를 생각하고 이러한 타자성이 우리로 하여금 북한이라는 타자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일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층적인 감정을 직면함으로써 언론에서 북한이라는 타자를 다루는 태도와 자신이 접한 주변 사람들의 북한에 대한 생각이 천차만별인 현상도 함께 이해해 볼 수 있다.
나아가 북한이라는 타자에 대한 이 감정의 근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사유할 수 있다. 레비나스는 우리가 전적으로 다른 것으로 향하는 욕망을 가지며, 이러한 욕망의 대상이 타자라고 강조한다. “형이상학적 욕망은 전적으로 다른 것, 절대적으로 다른 것으로 향한다(E. Levinas, 1961: 27).” 즉, 형이상학적 욕망은 자아로 하여금 자신과 다른 것을 향하며, 우리는 이 욕망을 통해서 타자의 타자성과 외재성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북한이라는 타자에 대한 우리의 감정의 근원 또한 이러한 방식으로 설명해 볼 수 있다. 즉, 타자성과 외재성이라는 특성이 우리로 하여금 북한이라는 타자에 대한 논의를 어렵게 만들기도 하지만 이와 다르게 타자를 타자로 사유하게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북한에 대해 가지는 다층적인 감정은 우리의 사유에 방해가 되는 동시에 우리의 사유를 시작하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타자윤리의 관점에서 통일교육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 즉, 북한이라는 타자가 우리로 하여금 불러일으키는 다층적인 감정을 있는 그대로 직시할 수 있는 사유의 힘을 키우는 시도가 필요한 것이다. 물론 레비나스의 타자윤리적 사유가 지나치게 존재론적인 층위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통일교육을 접근함에 있어서 다양한 논리 중의 하나는 윤리적 측면에 대한 고려일 것이며, 특히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측면 이외에도 통일이라는 주제, 북한이라는 타자 자체에 대한 관심의 제고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할 것이다. 또한 타자윤리가 북한이라는 타자의 존재론적 측면, 윤리적 측면 등을 심도 있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통일교육의 근간이 되는 여러 사상들 중에서도 하나의 새로운 측면으로 다뤄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즉, 타자윤리를 통해서 학교 통일교육에서 타자성을 있는 그대로 사유하고 또 이를 북한이라는 타자로 확장하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우리는 타자 앞에선 주체만이 새로운 주체성을 모색할 수 있다는 점을 제시한 바 있다. 이는 우리가 북한이라는 타자를 모른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즉, 이질성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수용하는 것이 필요하며, 이러한 수용에서 통일교육을 위한 동기가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북한이라는 타자를 알지 못하며, 앞으로도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알지 못함이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외재성에 귀를 기울이는 욕망을 불러일으킬 것이며, 타자에 대한 욕망은 만족 없는 욕망이라는 점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동기 부여할 것이다. 진정한 주체성은 타자성에 대한 직면에서 가능하다는 점에서 우리는 통일교육이 “스스로를 잃으면서 스스로를 되찾는 사태 자체(E. Levinas, 1974: 35)”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북한이라는 타자는 가장 가까우면서 가장 알 수 없는 자로서의 타자성 그 자체이며, 그렇기에 우리가 이 타자를 인정하고 수용함으로써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다. 통일교육의 인문학적 접근에서 북한이라는 이웃이 가지는 타자성의 의미에 대해 먼저 생각하고 그 이후에 타자성의 수용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타자성의 수용은 환대(hospitalité)와 맞아들임(accueil)3)을 통해서 실현된다. 타자를 맞아들인다는 것은 타자의 타자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자 하는 것, 즉 내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타자를 동일화하고자 하는 나의 인식을 판단 중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중심적 자발성에 대한 문제 제기를 통해서 타인의 낯섦을 윤리적 성취의 계기로 만들 수 있다. 즉, 북한이라는 타자의 낯섦을 환대하고 맞아들일 때 윤리적 주체로서의 실천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레비나스가 타인을 맞아들임, 즉 환대가 주체성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E. Levinas, 1961: 16). 이는 동일자로서의 향유를 멈출 때에만 성취할 수 있는 환대로서의 주체성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북한이라는 이웃을 나의 이해 안에서 포괄하지 못할 때에도 실현할 수 있는 윤리적 성취라고 할 수 있다.
레비나스의 동료이자 비판적 지지자인 자크 데리다는 레비나스 사후 헌정 강연에서 레비나스가 말하는 환대를 모든 곳에서 작동하는 “타인을 향한 최초의 모든 몸짓(J. Derrida, 1997: 57)”으로 정의한다. 이는 타자윤리의 실현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이 환대와 맞아들임이라는 점과 구체적인 타인에 대한 응답은 환대를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점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통일교육에서 북한이라는 타자를 향한 환대와 맞아들임의 시작이 어떻게 일어나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논의를 해야 할 것이다. 즉, 환대와 맞아들임으로서의 응답이 무엇이며, 이러한 응답은 타자의 타자성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실현될 수 있는지 등에 대해서 학생들의 생각을 묻고 답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환대와 맞아들임이 주인의 입장에서 손님인 타인에게 시혜를 베푸는 것과 같은 이미지로 생각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도 함께 성찰할 필요가 있다. 타인에 대한 환대가 시혜적인 것으로 오인되는 사례에 대해서 생각하고 이러한 사례들의 문제점을 살펴볼 수도 있다. 환대가 주인의 관점에서의 환대로 여겨진다면 이는 지속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타자의 타자성에 대한 수용으로도 이어질 수 없을 것이다.
레비나스는 응답으로서의 환대와 맞아들임의 가장 근본적인 예를 대화에서 찾는다. “대화 속에서 타인에게 접근한다는 것은 그의 표현을 기꺼이 맞아들이는 것이다. 이 표현 속에서 그는 사유가 그 표현에서 간취하는 관념을 매 순간 넘어선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아의 능력을 넘어서서 타인으로부터 받아들임을 뜻한다(E. Levinas, 1961: 57).” 이는 대화를 통해서 타자의 표현을 맞아들이는 것이 환대의 시작이라는 점을 제시한다.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고 설득하고자 하는 대화는 상대방과 나의 입장이 가지는 차이점을 줄이고 타협점을 찾고자 하는 의도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레비나스의 응답으로서의 대화는 타인의 표현을 맞아들이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근본적인 태도 전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러한 타자의 표현에 대한 환대로서의 응답은 유책성과도 관련이 있다. 북한이라는 타자와의 대화는 언제나 항상 ‘내가 저 자리에 있을 수 있음’이라는 표현을 담고 있다. 우리 중에 누구도 이 구체적인 타자 책임에 있어서 무관할 수 없으며, 오히려 통시적 시간성에 관한 사유 안에서 이 유책성은 배가되고 있다. 그렇기에 통일 수업에서 북한이라는 구체적인 타자에 대한 책임윤리를 논하기 위해서 이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레비나스의 대화로서의 환대에 대하여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절대적이고 과장되고 무조건적인 환대란, 언어를, 규정된 특정 언어를, 심지어는 타자에게 건네는 말을 중단하는 데서 성립하는 것이 아닐까 자문해 보기에 이르렀다(J. Derrida, A. Dufourmantelle, 1997: 197).” 이는 대화는 환대의 시작이지만 타인에게 말을 건네는 것을 멈추는 것이 진정한 환대인 경우도 있다는 주장이다. 즉, 우리가 내 앞의 타인이 대화를 시작하게끔 부추기지 않아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4) 이는 타인을 무한의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환대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환대의 구체적인 실현에 있어서의 입장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또한 통일 수업에서 학생들과의 논쟁적인 주제로 다룰 수 있다. 우리가 실현하고자 하는 환대는 말을 건네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는지 혹은 말을 멈추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논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레비나스의 논의는 자아가 성취할 수 있는 윤리는 타인을 무한의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점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에 ‘말을 건넴’과 ‘말을 멈춤’ 모두가 필요할 것이다.
통일교육에 있어서 환대에 대한 논의의 또 다른 측면은 북한이라는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환대에 대한 것이다. 데리다는 레비나스의 환대가 무조건적인 환대를 뜻하며, 이는 조건적인 환대와의 단절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J. Derrida, A. Dufourmantelle, 1997: 43). 또, 환대의 정신인 환대의 법 자체와 구체적인 실천을 위한 환대의 법들 사이에는 이율배반이 존재한다고 말한다(J. Derrida, A. Dufourmantelle, 1997: 113). 이는 레비나스의 논의가 무조건적인 환대의 정신을 강조하는 반면 구체적인 환대의 실천적 측면에서는 뚜렷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기도 하다. 이를 타자윤리를 통일의 윤리로 재해석하고자 할 때 직면하게 되는 난점으로 제시한 연구도 있다(박병기, 2017: 21). 즉, 타자윤리를 통일의 윤리로 재해석하고자 할 때 구체적인 방법과 절차를 제시하는 것에 미흡함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을 본 논의의 맥락에 적용하자면 다음과 같이 두 가지의 물음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타자 중에서 적대적인 타자에 대해서도 환대해야 하는 것인가? 다른 하나는 환대의 구체적인 실천적인 방법과 절차는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환대의 정신은 조건적인 환대를 통해서만 구현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레비나스의 타자윤리에서 조건적인 환대 또한 무조건적인 환대의 정신 그 자체에서 시작될 수 있으며, 조건적인 환대가 구체적인 실천을 위한 방안을 구상할 때 또한 잊지 않아야 할 것이 무조건적인 환대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제는 하나의 지향으로서 지녀야 할 것이며 급변하는 상황에 알맞은 구체적인 실천과 방법 구상에 있어서는 끊임없는 논의에 기반하여 대안들이 제시되고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쟁점에 대한 성찰은 통일교육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우선, 통일이라는 주제를 마주함에 있어서 우리가 적대적인 타자에 대해서도 환대해야 하는가에 관한 물음을 열린 물음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논의를 시작함으로써 북한이라는 타자에 대한 비대칭적인 책임은 무엇이며, 이러한 책임을 완수하기 위한 조건적인 환대의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논의를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설령 통일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는 학생이라 하더라도 가장 가까우면서도 먼 타자가 북한이라는 점을 수용하고 어떻게 지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사유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서 사유하지 않고 통일의 당위성과 기대효과 등에 대해 수업을 한다면 오히려 북한과 통일에 대한 무관심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오거나 반대로 통일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경제적인 이득을 중심으로 생각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렇기에 타자와의 관계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중심에 두고 통일교육을 구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물음을 수업의 중심에 두고 환대의 정신을 구현하는 구체적인 조건과 방법에 대해서 구상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방식의 접근은 북한이라는 타자를 어떻게 환대할 것인가에 대한 첨예한 논쟁을 다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타자에 대한 환대와 맞아들임의 윤리적 태도가 왜 필요한가에 대하여 충분히 다루고 난 후에 적대적인 타자도 환대할 수 있는가의 물음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비대칭적인 책임에 대한 사유는 적대적인 타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가 윤리적 태도를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제시한다. 통일교육에 있어서 책임에 대한 사유는 또한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층위의 북한이라는 타자에 대해서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의 문제를 스스로 생각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때의 다양한 층위는 존재론적인 층위에서의 타자, 윤리적 층위에서의 타자, 현실적인 정치적 층위에서의 타자가 있을 것이다. 통일교육 안에서 북한이라는 타자를 바라보는 다양한 각도가 있을 수 있음을 제시하고 현실적인 층위에서의 타자로서의 북한에 대한 논의에 앞서서 다층적인 타자로서 북한에 대해서 물음을 던지고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 가능하다. 아울러, 이러한 논의는 환대의 구체적인 방안에 대한 논의의 과정에서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이어지는 절에서 다룰 새로운 미래의 탄생으로서 통일을 바라보는 접근 또한 타자에 대한 환대와 더불어 통일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새로운 전환점의 하나로 다뤄질 수 있다.
앞선 절에서 다룬 환대와 맞아들임의 응답은 통일 이전과 이후에 필요한 실천으로도 작용한다. 아울러, 이는 모든 낯선 이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환대와 맞아들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레비나스의 논의에서 통일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논의될 수 있는 것인지, 이러한 의미가 학교 통일교육에서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고찰을 위해서 다산과 번식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통일이라는 새로운 탄생에 관해서 논의하고자 한다. 다산과 번식은 생명의 탄생에 기반해서 다루어지는 주제이기에 남북한 간의 통일과는 다소 동떨어져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산과 번식의 의미에서 바라본 통일은 하나의 비유로 이해될 수 있으며, 또 이전에 그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미래로서의 통일이라는 의미에서 일종의 탄생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레비나스는 아이의 탄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미래는 아이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나의 것이며,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이다. 하지만 나 자신은 아니다. 이 미래는 내 과거로 다시 떨어져 내 과거와 결합하여 어떤 운명을 그려 내지 않는다(E. Levinas, 1961: 413).”5) 여기서 우리는 아이의 새로운 탄생이 나 자신이면서 나 자신과 동일할 수 없는, 내 과거를 지니고 있지만 내 과거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아이의 탄생은 나 자신의 동일성을 흔들면서 온전히 새로운 것의 탄생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미래의 탄생이라는 측면에서 통일은 세대를 이어가는 동시에 또 온전히 새로운 세대의 탄생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의미에서 고찰한 통일은 우리 사회가 가지는 동일성을 뒤흔들고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미래를 예고한다는 점에서 두렵거나 부담스럽기만 한 사건의 이미지를 탈피할 수 있다. “세대의 비연속성 즉 죽음과 번식성은 욕망으로 하여금 자신의 고유한 주체성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며, 자신의 동일성이 지닌 단조로움을 멈추게 한다(E. Levinas, 1961: 459).” 세대와 세대 사이가 연결되어 역사가 흐르지만 또 연결이 끊어져야만 새로워질 수 있듯이 통일이라는 사건 또한 일종의 비연속성을 잉태하고 있다. 이전 체제의 죽음과 새로운 체제의 생성이라는 점에서 통일은 새로운 세대와 미래를 예고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통일교육에 있어서 이러한 시각은 다음과 같은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 우선, 남한과 북한이라는 두 정치체제가 만나서 새로운 체제를 탄생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통일은 기존의 역사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측면을 지니고 생성될 것이다. 그렇기에 통일을 단지 남한과 북한의 물리적 혹은 정치적 결합으로 여기기보다는 새로운 탄생 혹은 새로운 미래의 시작으로서 구상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구상에 있어서 레비나스의 논의는 나 자신이지만 어떤 면에서 더 이상은 나 자신일 수 없는 아이라는 존재에 대한 사유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통일과 통일교육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에 대한 논의를 풍부하게 만들 수 있다.
다음으로, 통일을 다산과 번식이라는 의미로 고찰할 때 기존의 통일이 가지는 이미지를 새롭게 만들 수 있다. 우리는 통일이라는 주제를 마지못해서 떠맡은 과제와도 같이 느끼기도 한다. 과거의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이 분단이기에 이러한 비극은 한반도에 자리를 잡고 사는 모든 사람에게 마치 일종의 연극 무대처럼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비극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대다수 세대에게 이 비극은 이미 지나간 사건이며 자신이 선택한 적 없는 과거의 유산과도 같이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앞서 비유한 바와 같이 분단이라는 역사의 사건이 남긴 흔적은 연극의 무대와도 같이 우리 삶의 전반적인 조건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 누구도 이 조건들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바 없지만 이 땅에 자리 잡았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이에게 구속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통일이라는 숙제가 기약 없는 먼 미래에 대한 헛된 기대와도 같이 느껴지게 될 수 있다. 하지만 통일을 과거 역사에 풀지 못한 숙제와도 같이 느끼기보다 완전히 새로운 탄생 혹은 미지의 미래와도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면 통일이 기약할 수 없는 미래의 사건임에는 틀림없지만 이러한 사건이 가져올 변화를 남북한 사이의 다산과 번식으로서의 새로운 창조의 과정으로 달리 상상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의 전환을 통해서 학생들과의 수업에서 통일의 이미지는 부담스럽고 피하고 싶은 과제와도 같은 것이 아니라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건으로 변모할 수 있다. 특히, 급변하는 대북 정세에 따라서 관련된 언론 보도가 시시각각 달라진다고 해도 통일교육에 있어서 우리가 주목하는 통일이 하나의 새로운 탄생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으며, 수업에서 북한이라는 타자를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의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하는 것이 새로운 탄생으로서의 통일을 예고하는 일이라는 점을 설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통일이 가지는 의미를 새로운 탄생으로 제시할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은 학교 통일교육이라 할 수 있다. 사회적인 분위기와 가정에서의 교육이 설령 통일에 대해서 부정적이거나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통일교육이 이루어지는 교실은 통일에 대해서 일관된 비전을 유지할 수 있고 또 통일이 가지는 미래적 가치를 경제적인 비용이나 정치적인 유불리 가능성을 뛰어넘어 사유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까지의 통일교육이 이와 같이 일관된 비전을 제시했는지에 대해서는 비판의 여지가 있으며, 통일을 미래의 탄생과도 같은 창조의 과정으로 다루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럼에도 학교에서의 통일교육은 많은 도덕 교사들의 진정성 있는 고민거리가 될 만큼 자리를 잡아 왔으며, 도덕과 교육적 논의 안에서도 새로운 통일 논거를 모색하기 위해서 여러 연구들이 이루어져 왔다. 김병연은 한국전쟁에 관한 교육을 화해교육과 평화교육적 접근을 중심으로 제시하면서 전쟁 자체가 갖는 비인간성을 부각시켜 전쟁의 폭력성을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며, 전쟁에 대한 기억을 공동체적 기억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김병연, 2022: 253). 함규진은 통일교육에서 통일 당위성이 민족주의, 실리주의, 보편주의에 기반한 인도주의로 제시되는 것이 한계를 지닌다는 점을 밝히고 남한 사회의 근본적 개혁을 위한 통일이 새로운 당위적 근거로 논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함규진, 2016: 406-410). 이러한 논의들은 인문학적 접근을 통해서 통일의 근거를 새롭게 모색한다는 함의를 지니고 있으며, 학교 통일 교육에 입각해서 대안적 논의를 시도하고 있다. 본 논의는 이러한 선행연구의 성과를 이어받아 새로운 탄생으로서의 통일의 의미를 고찰하고자 했다.
Ⅳ. 결 론
본 연구는 통일교육에서 인문학적 접근을 통해서 새로운 논의의 계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했으며, 나아가 통일에 관한 회의적인 시각이 만연한 분위기에 휩쓸려 통일교육도 함께 경직될 수 있는 현 상황에서 북한이라는 타자를 직면하는 것과 통일의 인문학적 의미에 대해서 새롭게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제시하고자 했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근본적인 사유의 전환을 요청하는 것이기에 학교 수업에서 곧바로 적용할 수 있는 교수․학습 모형을 개발하는 것에 비해서 그 효과가 언제 나타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점에서 너무 느린 대안이라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새로운 근거를 모색하고 통일의 인문학적 의미를 성찰한다는 점에서 느리지만 탄탄하고 시의적절한 대안이 될 수 있다.
본 연구를 진행하면서 교사로서 통일교육을 하면서 느꼈던 여러 감정들이 함께 떠오르기도 했다. 정권에 따라서 통일교육에 대한 기조가 달라지면서 가지게 된 부담감, 통일수업에서 학생들의 동기가 점차 줄어드는 현실을 마주하면서 느꼈던 무력감, 통일수업에서 학생들이 활발하게 참여할 때의 효능감 등이 통일교육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고민하게 만들었던 원동력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통일수업에서 구체적인 통일 과정에 대한 남북한의 입장 차이, 분단비용과 통일편익 등의 경제적 효과에 대한 비교 또한 통일이라는 주제 자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수업에서 다룰 필요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통일이 왜 필요한가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보고 인문학적으로 성찰할 기회를 제공하지 않고 통일의 역사적 이유, 경제적 혹은 정치적 이유 등으로 동기부여를 할 경우에 통일의 과정은 때로는 비경제적일 수 있으며 정치적 관점에 따라 통일에 대한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한다는 점을 논의하기 어렵게 된다. 인문학적 접근이 통일수업의 바탕에 자리하고 있을 때 학생들의 관심 속에서 통일교육이 꾸준하게 이루어 질 수 있다.
남아있는 과제는 통일 교육에 있어서 북한이라는 타자와의 관계 이상의 관계에 대한 논의이다. 레비나스는 근접성을 이웃으로서의 타자에 대한 해명과 주로 연결 짓고, 이웃과 나를 둘러싼 자는 제삼자로 제시한다. “타자는 삼자와 맺는 관계 속에 있다. 이 삼자에게 나는 전부 응답할 수 없다. … 제삼자는, 그때까지 타자 앞에서 유일한 한 방향으로 의미작용을 해왔던 말함에 모순을 도입한다. 이것이 본래 책임의 한계이고 문제의 탄생이다(E. Levinas, 1974: 340).” 제삼자의 문제설정을 통일에 대입한다면 북한과 남한 사이의 관계를 둘러싼 제삼자, 즉 이웃의 이웃과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게 된다. 이는 책임으로서의 응답뿐만 아니라 사회 정의에 관한 논의를 통해서 풀어나가야 할 주제이다. 제삼자에 대한 레비나스의 언급은 아주 간략하기에 이에 대한 논의를 구체화하여 통일 교육과 연결 짓기 위해서는 또 다른 측면의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이 주제는 추후의 연구과제로 남기고자 한다.






